냉소주의자를 구원한 맹인의 유머러스한 역습
[문학 리뷰]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이야기의 화자는 초반부터 아내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맹인의 방문에 대해서 무척 냉소적이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다. 나는 화자의 말투에 웃으면서 읽었다.
특히 화자가 맹인을 대하는 태도는, 혼잣말에서 비웃음과 비꼬는 어조가 역력하게 보였다. 그는 맹인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게 어떤 삶인지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그의 아내 또한 십 년이나 맹인과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아주 친절하고 그를 배려하는 듯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속으로 맹인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자의 친절과 배려 또한 무지에서 왔다.
카버의 <대성당>은 이 작품에 수록된, 앞선 작품들인 <깃털들>, <셰프의 집>, <보존>과 같은 작품들에 비해 매우 유머러스하고 독자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말투도 달랐다. 전자의 작품들은 꽤 건조해서 말을 절제하는 느낌이었으나 이 <대성당>만큼은 독자 친화적이라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아주 유머러스하다. 웃음을 주고 있다.
소설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장면은 남자와 맹인이 함께 대성당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로 대성당을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맹인의 제안으로 종이에 대성당을 그렸다. 이때 맹인이 남자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서 함께 선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마저도 특별히 잘 된다는 느낌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맹인이 주도적으로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보였다. 맹인의 손을 따라 대성당을 그리는 상황에서 남자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잠시 잊을 수 있는 정도의 감각을 체험했다. 작품 초반에 남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경험에 한정해서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맹인이 어떻게 보고 들을 수 있는지는 전혀 상상한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었다. 즉 대성당을 그리는 이 장면은 상상의 부재, 인식의 부재, 무지를 총체적으로 다 보여준다. 결국 이건 맹인의 역습이라고 할 수밖에.
남자가 자신의 주도로 대성당을 그릴 때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리지 못했기 때문에, 손이 움직이는 정도만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맹인의 손을 따라갈 때 비로소 그는 맹인이 어떻게 본 적도 없는 대성당을 그릴 수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에 더해 맹인이 그리는 대성당을 상상하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비로소 상상력을 발휘했고 시공간의 부재로 대성당을 체험할 수 있었다. 즉 시공간 너머에 있는 상상과 공감의 영역에 발을 들임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편협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버는 단순히 맹인이 무엇을 보고 들을 수 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지, 상상력의 부재, 인식의 부재가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게다가 아주 유머러스한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말하고 있다. 실로 그는 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