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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Dec 02. 2023

기다리지 않는 때




퇴사한 입사 동기와 얼마 전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2주에 한 번 하기로 했다. 나의 수준에 맞추어 그다지 부담되지 않는 코스부터 시작했다. 만나서 가만히 앉아서 밥 먹고, 차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3시간 정도 걸으니 운동도 되고 좋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모셔두기만 했던 트래킹화를 꺼내 신었다. 몇 년 전에 동기와 페루 여행을 갈 때 샀던 신발인데 그 이후로도 간간히 걸을 일이 있으면 신었는데 날씨가 쌀쌀해진 이후로는 거의 신지 못했다.








첫 산행에서 둘이 겁도 없이 출발했던 페루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 이 신발이 그때 페루 갈 때 신었던 신발이라며 신발 이야기로 이어졌다. 언제 사두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등산화도 있는데 아직 제대로 신어보지도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동기는 신발도 너무 오래 신지 않으면 가죽도 갈라지고, 이음새 부분도 터져서 나중에 못 신게 되니까 부지런히 신으라고 했다. 가죽 구두도 오랫동안 보관만 했다가 몇 년 후에 신으려니 가죽이 갈라져서 못 신고 버린 기억이 있었지만, 등산화는 구두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며 반신반의했다.

동기의 조언대로 두 번째 산행에는 오랫동안 묵혀둔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산 지 10년 이상은 족히 넘었지만 신은 건 겨우 두세 번이 고작이었다. 작고 앙증맞지만 발목을 탄탄하게 잘 잡아주어서 제법 가파른 코스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그동안 무릎이 좋지 않아 산행을 부담스러워했는데 평지를 걷는 것과는 또 다른 맛으로 돌아올 때는 작은 성취감도 있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세 번째 산행을 했다. 산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가파른 오르막만 있어 제법 힘이 들었다. 더욱이 2주 동안 이어진 체기가 가시지 않아 속이 부대끼면서 힘이 들었다. 그래도 내려올 때는 완만한 코스로 접어들어 조용한 초겨울의 정취를 즐기며 또 한 번 백수의 짜릿한 행복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두 번째 산행에서 내리막 길에 계속 발가락이 신발 앞 창에 와 부딪히더니 결국 발톱 두 개가 새까맣게 변했지만 이번에는 내리막에서 점차 발을 딛는 요령도 조금 생겼다. 든든한 등산화가 그러는데 한몫 단단히 해주었다.









출발점으로 내려와서 에어건으로 신발의  먼지를 털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털다 보니 신발 앞 창이 뭔가 이상해 보였다. 내가 잘 못 봤나?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세상에나! 양쪽 신발 밑창이 전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동기를 불렀다.

"이것 봐봐, 이게 네가 말하던 그거야? 신발 밑창이 완전히 떨어진 거야?"
"응. 이거 완전히 다 나갔네."
"다시 붙이면 되는 거야?"
"그런데 위의 가죽도 다 갈라져서 안 되겠는데?"
"그럼, 이건 구제가 안돼? 버려야 돼?"
"응. 그래도 다 내려와서 다행이다. 도중에 그랬으면 내려오기 힘들었을 텐데...."








집에 도착하기까지 밑창이 잘 붙어 있으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집까지는 무사했다. 집에 오자마자 신발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면서 참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헛헛하기도 했다. 등산화는 튼튼하고 직물로 되어 있어 오래 두어도 변함이 없을 줄 알았다. 아무리 오랫동안 쟁여 두어도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 꺼내 신으면 되는 줄 알았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지만, 등산화도 기다려주지 않을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세상에서 온전히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함께 있어서 언제나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나, 사는 동안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도 다 때가 있다는 것을 새삼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의 적당한 때가 가장 화려한 적기이며, 최고의 절정일 것이다.

10년 넘게 묵혀 두었던 등산화도 터지기 전까지 어쩌면 나를 애타게 기다렸을지 모른다. 튼튼한 겉모양 그대로 있을 줄 알았는데 기다리는 세월 동안 조금씩 해지고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참하게 터진 밑창을 보며 내 옆구리 언저리가 툭 하고 터져나간 것 같았다.









앞으로 살아갈 남은 날 동안 얼마나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남았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발 밑창이 터지는 일은 하나, 둘 줄여볼까 한다. 똑같은 후회는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리지 않는 그때가 이제는 내게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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