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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an 29. 2024

성질을 알면......




어반 스케치를 1년 정도 그리다 보니 수채화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어반 스케치는 오다가다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 후딱 그림 한 장 그리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수채화의 다양한 맛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평생 교육원에 등록을 해서 한 학기를 마치고 이제 계절 학기 수업 중이다.

투명하고 맑아서 오히려 가볍다고 여겼던 수채화가 하면 할수록 민감하고 오묘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화와 또 다른 많은 기법이 있어서 알아가는 재미는 있지만, 과감하게 하지 못하고 자분자분 곱게 다듬어 야 하는 것은 언제나 숨 막히는 일이었다.





             © acton crawford, 출처 Unsplash




같은 수채화라고 하지만 짧게 후다닥 그리고 마는 어반 스케치와는 달리, 강하고 거친 터치를 좋아하는 나에게 수채화는 엄청난 인내를 요구했다. 성질대로 했다가는 그림을 망치는 일은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연신 그리면서도 이걸 때려치워야 하나? 하는 갈등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교실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저들도 나와 똑같이 이런 고비를 넘겼을까?'
'저 사람들은 편안하게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럴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유화나 어반 스케치도 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견디어 낸 것처럼, 이 시간만 잘 견디면 나아지지 않을까?'





       © kelli_mcclintock, 출처 Unsplash





하루만 더 수업을 해 보고, 그림 한 장만 더 그려 보고, 이번 학기까지만 마치고..... 그러면서 하루 이틀, 일주일 이 주일, 한 달 두 달이 갔다.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던 것과 달리 일본 여행 중에 계절 학기 등록을 마쳤다. 한 번만 더 해보고 결정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 수채화의 성질을 조금씩 알아갔다. 도무지 내 뜻대로 되지 않던 것이 그 특성을 알고 접근을 하니 내가 의도한 표현이 그나마 나오기 시작했다. 물이 조금만 더 들어가거나 덜 들어가도, 물을 발라 놓은 위치가 조금만 달라도, 한순간에 잘못 선택한 밑 색이 그림의 분위기를 망쳐 놓기도 하고, 힘 조절을 잘 못한 붓 터치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 93 norart93, 출처 Unsplash





민감해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역으로 그 성질을 잘 이용하면 세심한 그림이 될 수 있었다. 요즘은 유화를 그릴 때 휘갈겼던 성질머리를 누르고 한 땀 한 땀 손바느질 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내가 한 대로 정직하게 번져가는 물과 물감의 조화가 색 실로 수를 놓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들끓었던 수채화에 대한 분노는 내가 그 특성을 잘 알지 못하고, 그 특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

어떤 붓이 어떤 물감을 입고, 어떤 종이와 만나느냐에 따라 다 제각각이다. 각자의 속성을 제대로 알아야 특징에 맞게 조절해서 그릴 수 있고 좋은 표현이  수 있다. 재료와 그림의 잘못이 아니라 그 구성원의 성질을  알지 못해 제대로 다루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 g_leighton, 출처 Unsplash





펼쳐진 스케치북을 조금씩 메우며 생각했다. 한눈에 다 보이는 이 스케치북을 메우기까지 각기 다른 재료의 성질과 특징을 알려고 그토록 용을 썼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하고 거대한 사람 간의 관계를 위해 나는 얼마나 세심하고 많은 애를 썼을까?

내 옆에, 앞과 뒤에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잘 알고 그 관계를 수채화처럼 그려간다면 곱게 물감을 먹은 좋은 그림이 되지 않을까?


가벼워서 들떠 보이지 않게 잘 어우러지는 색을 조금씩 섞어 종이를 칠해 간다. 나를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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