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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Feb 29. 2024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체육센터에 수영을 하러 가면 전자 키로 당일 사용할 사물함을 배정받는다. 수영복을 넣어 다니는 가방 한쪽에 카드를 넣어 두고 사용했다. 그러다가 오전에 요가를 시작하면서 요가 가방과 수영 가방에 번갈아 가며 키를 가지고 다니려니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귀찮고 번거로웠다. 

그래서 회원 번호를 기억했다가 수기로 입력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니 운동하러 갈 때마다 굳이 전자 키를 챙겨가지 않아도 되어 편리했다. 진작 이럴걸...... 하면서 아주 만족했다. 





© constantinevdokimov, 출처 Unsplash




8자리 숫자를 누르고 번호표가 나올 때마다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 오늘도 정확하게 맞추었다는 것, 아직 기억력이 쌩쌩하다는 것...... 매일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젊었을 때라면 거론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것이다. 가볍게 훑으면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무엇이든 선명하게 기억하던 그때였으니 지금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신 마취로 수술을 몇 번하고,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은 뚝뚝 나가떨어졌다. 왼쪽 페이지에서 공부했던 새로운 영어 단어가 오른쪽 페이지에 나왔지만, 이미 까먹고 가물가물할 때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할 수 없이 다시 사전을 찾으면서 이렇게 복습하는 거야...... 하고 억지로 위로를 해보지만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 hudsoncrafted, 출처 Unsplash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요가 수업을 위해 숫자를 눌렀다. 번호가 아니라고 뜬다. 실수로 잘못 눌렀나 싶어 기억나는 대로 또박또박 다시 눌렀지만 여전히 틀린 번호다. 비슷한 번호로 세 번까지 눌렀지만 계속 오류다. 

마침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모르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당황스러웠다. 어제까지 눌렀던 번호인데 왜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 번호나 계속 누르고 있을 수가 없어 직원에게 가서 상황 얘기를 하고 번호표를 받았다. 





© sarandywestfall_photo, 출처 Unsplash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해 놓으세요"


그럴 수 있다는 직원의 말이 위로일 듯, 말 듯 그 경계에서 한동안 넘실거렸다.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었다. 너무 내 머리만 믿고 있었던 것일까? 겨우 숫자 8자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아직도 아득한 그때의 팔팔한 청춘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 juho_aleksi_luomala, 출처 Unsplash




섬광처럼 스치고 간 그 짧은 순간의 아뜩함은 미리 준비하라고 알려주려는 것일까? 또 찾아오더라고 당황하지 말라고...... 아무리 몸부림치고, 용을 써도 나이가 들면서 빼앗기고, 내놓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 내 안에 있던 것인데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서 내주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만기가 된 전셋집 같다. 

아무도 알려주고, 말해주지 않아서 오롯이 내 것인 줄 알았던 기억마저 이제는 한 움큼 빼앗기고 덜어 내야 할 때인가 싶다. 목구멍에 걸린 커다란 알약처럼 아직 내 가슴에 걸려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마저도 고스란히 녹아들 수 있도록 이제는 나를 설득해야 할 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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