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집에서 알바를 하는 아래층에 사는 지인이 문득 내 생각이 나더라며 김밥 한 줄을 가져다주었다. 점심을 건너뛰고 수영을 다녀온 후라 기어 다니는 벌레라도 눈에 띄면 잡아먹을 것처럼 배가 고팠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차라도 하면서 같이 먹고 싶었지만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는 그녀에게 나는 감사의 멘트와, 고마움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이모티콘을 찾아 함께 보냈다.
이리저리 이모티콘을 찾다 보니 문득 1월에 하늘나라로 간 친정 언니 생각이 났다. 가끔 재미있는 이모티콘이 보이면 사서 보내주곤 했다. 그러면 언니는 좋아라 하며 답례로 문자를 보낼 때마다 그것을 수시로 날려주었다. 거동이 불편했던 언니는 이모티콘을 아이들 장난감처럼 좋아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적은 돈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동안 언니 생각이 날 때마다 애써 도리질을 쳤다. 그 생각에서 쉽게 빠져나올 자신이 없어서였다. 나날이 재미있고 기발한 이모티콘은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을 받아 들고 기뻐해 줄 언니가 없다.
재기 발랄한 이모티콘처럼 언니도 하늘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인인 둘째 언니에게 하느님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온갖 연줄을 다 동원해서라도 한 번 알아보라고 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엄마는 만났는지? 두 사람이 무슨 얘길 나누었는지, 이제는 아프지 않은지, 그렇게 훌쩍 가버려서 속은 편한지......, 수 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 정도도 못하느냐고 악다구니를 했다. 연줄로 빽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말이라도 해 봤어?라고 어깃장도 놓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고, 그게 자연의 섭리라는 말은 그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았을 때나 읊조릴 수 있는 말장난이다. 그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현실은 아무리 악악 대고 악을 써봤자 내가 저항할 수 없는 빈 메아리 같다.
사방으로 흐드러진 초록은 눈부신 햇살처럼 빛나는데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에 쫓겨 서둘러 빨래를 걷듯 언니는 일찌감치 자신의 초록빛 인생을 거두어들이고 갔다. 타박타박, 느린 걸음으로 무르익은 이 봄을 구석구석 나와 함께 더 들여다 보고나 가지......
문만 열고 나가면 진수성찬처럼 차려 놓은 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언니는 어디쯤 그 초록을 흘려 놓고 갔을까? 한숨 돌리고 있는 그늘가의 지친 초록을 보면 언니라고 여길까? 잎이 지고 난 자리에 꽃이 피면 언니가 지나간 발자국이라 생각할까?
찬란한 초록을 향해 어릴 때 불렀던 것처럼 한껏 불러 보고 싶다. 혹시 대답이라도 하려나?
"언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