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때로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홧덩어리 같았다가, 때로는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설렘처럼 유혹을 해도 모르는 척 꾹 누르고 살았다. 편안한 일상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예전과 다른 신체적 한계가 긴 여행의 출발을 주춤거리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TV에서 내가 다녀왔던 곳, 가고 싶은 여행지를 보면 금방이라도 보따리 하나 꿰차고 나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맴도는 고양이의 눈망울은 안락한 일상이나 저질 체력보다 나를 더 강하게 눌러 앉히는 걸림돌이었다.
누군가에게 맡겨 놓고 가야 하는 것이 제일 큰 부담이었다. 마침 부산 집 앞에 살고 있는 조카가 들락날락하며 봐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조카의 말을 듣고도 선뜻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표를 끊은 것은 점점 미루다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데도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여행이 고팠다기보다 백수인 내게도 짜릿한 자극이 필요했다.
퇴직 전에는 여행을 다녀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를 챙겨서 돌아왔다. 삶의 충전이기도 했지만, 더 알차게 살아야 할 동기이기도 했다. 백수가 되고 나서는 그런 게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평탄한 하루에도 고마워할 줄 안다. 그 무사함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잘 안다.
그런데도 낯선 곳에서 혼자 문제를 풀고, 퍼즐을 맞추며 가슴 부풀어했던 그것이 자꾸 그리웠다. 더 나은 때, 더 많은 조건이 갖추어진 때를 기다리다 보면 나는 어느새 70쯤 되어 있을 것이다. 30시간, 40시간이 걸렸던 페루, 칠레도 겁 없이 날아갔다 왔는데, 이번에는 유럽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직면한 현실은 60 중반의 아낙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덤으로 얹어주거나 깎아주지 않았다. 아르메니아 공항을 몇 번이나 검색하다가 말레이시아를 택한 이유도 그래서이다. 점점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고, 앞으로 내게 남은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지 나도 모른다.
한 달 동안 오래된 도시 두 곳을 돌며 그림을 친구 삼아 유유자적 돌아다녀 볼까 한다. 막상 퇴직을 하고 나면 등 뒤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있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세월은 나를 점점 늙은이로 주저앉히려고 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나를 옮아 멘다.
기회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선물처럼 툭 떨어지기보다는 내가 애써 찾아 나서야 만날 수 있는 보물찾기 같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어 욕을 하면서도 아직 붓을 놓지 않은 덕에 이번에도 그림이 좋은 여행 친구가 되어 줄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그 어느 여행보다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돌아올 때마다 다음 여행을 꿈꾸었던 예전의 나와 사뭇 멀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