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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Mar 11. 2021

글을 엮으며......



2021. 03. 11.


                                          

시리즈 <자식이 부모를 자라게 한다> 맺음말



살면서 몇 번의 전신마취로 수술을 할 때마다 내 기억력은 두부모 떼어내듯 뚝뚝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나이빨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젠 아예 두부판째 다 빼앗길 판이다.

아기자기한 성격이 아니라서 꼼꼼하게 메모를 하거나, 사진첩 같은 것을 잘 정리하는 편이 못된다. 게으른 탓에 그저 머리만 믿고 기억하고 가슴에 접어두는 쪽을 택해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긴 세월 앞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처음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을 줄 알았던 숱한 기억들이 어느새 바래고, 날아가 버리고 심지어 미미한 흔적조차 더듬지 못할 때도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얼마나 참담했는지 모른다. 

드라마에서 감초처럼 등장하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무리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 때문에 몸부림칠 때 나는 참 편하게 생각했었다.

"기억이 안 나면 말지, 왜 저렇게 힘들게 기억하려고 할까?"

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 생각인지 막상 내가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한순간에 기억을 강탈당한 사람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손에 보이는 뻔한 사실이 있음에도 아무런 단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어슴푸레나마 알 것 같았다.



© argtone, 출처 Unsplash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몇 년 뒤 어쩌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여기가 어디지?' '언제 간 거야?' 하고 가물가물할 때가 있다. 그래서 한 줄, 두 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디를 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길을 나섰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일기를 쓰듯 메워나갔다.

머물렀던 그때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 훗날 어느 때고 열어보면 예전의 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글이라는 것이 어쩔 도리 없이 늙어가는 내게 더없이 좋은 각성제가 되었다. 아득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짚고 일어설 수 있는 지팡이 같은 것이었다.

한 편, 두 편 여행 글을 쓰다가 코로나로 발이 묶여 꼼짝없이 지내다 보니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여행 사진처럼 빛바랜 기억 하나, 둘 떠올리며 내가 어찌 살았는지 되짚어 보았다. 그중의 하나가 자식에 관한 글이다.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며 이런저런 일에 부대끼다 그 안에서 내가 더 성숙하고 웃자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식은 내게 그런 계기를 수없이 던져 주었고, 나는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길을 찾아야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 길이 있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길이 있기도 했다. 자식 덕분에 길을 찾고, 자식이 길을 찾아준 셈이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연신 들이닥치는 코앞의 현실에 떠밀리듯 살았던 그 시절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보석 같은 순간은 있었다. 처음에는 그 반짝이는 순간을 남겨두려는 의도였는데 차츰 글을 쓰다 보니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내가 쓴 글들이 나를 수식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어느새 나를 조용히 씻겨주는 정화수가 되고 있었다.

어미로서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회상하는 되돌이표 안에 내가 자식이었을 때 미처 알지 못한 수많은 과오가 얼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식과 부딪히던 매 순간 나는 내 자식의 어미이자, 내 어머니의 자식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는 나도 내 아들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도둑년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부모 심정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못된 년이었다. 

염치가 없어 후회조차 대놓고 하지 못한다. 18편의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되돌릴 수도 없고, 어쩌지도 못하는 아쉬움만 남는다. 살다 보면 아직도 남아 있을 자식과의 실갱이에 자꾸 앞서는 조급한 마음 작게 저며, 그 아쉬움에 담갔다가 빛 좋은 날 바람에 말리기를 반복하면 염치없는 이 후회가 조금은 줄어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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