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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을 진정 변화하게 만드는가?

물리적 환경을 넘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된 순간

by 순코딩

2020년 11월 공장 3조 2교대 야간근무를 마치고 쉬는 날에 나는 구미 금오산 인근 카페테라스에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상쾌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붉게 물들어가는 금오산 나무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며 가을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가을을 온전히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늘은 마음이 평온하다. 금오산의 아름다운 경치, 예쁜 카페 그리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까지 더해져 내 마음을 더 충만하게 해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사색이라는 궁상을 떨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저 산과 나무들처럼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 생각과 마음 또한 변해가는 걸 느낀다.

하지만 정말 내가 변한 것이 맞는 것일까? 변해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잠시 바꿀 뿐 죽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저 자리에서 우둑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나무와 같이 나도 환경이 바뀔 때마다 잠깐 내 색깔을 잠깐 바꿀 뿐 본래의 ‘나’라는 놈은 변한 게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한번 보잘것은 없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던 나의 불타는 20대 인생 여정을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20대 이전의 ‘나’란 놈은 참 단순한 녀석이었다.

누구보다 깊게 생각하는 걸 싫어했고 복잡한 걸 싫어했다.

공부도 지지리도 안 했고 또 못했다. 공부만 못했으면 그나마 부모님 속이 덜 뒤집어졌겠지만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만들어냈다.

사고(accident)는 많이 쳤지만 사고(thinking) 하지는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논리도 없고 근본도 없는 긍정만 내 머릿속에 주입시켜 가면서 하기 싫은 건 안 했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다.

미래에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의 ‘무지함’이 걱정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인식할 정도의 사고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 정도를 비교해볼 지식 또한 내 머릿속에 없었다.

공업 고등학생이라면 졸업할 때면 자격증 하나라도 따서 나오는 게 당연하다.

3년 동안 공부하는 것이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실습과 이론 공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고를 졸업했지만 자격증이 단 1개도 없었다.

아! 하나가 있긴 하다. 바로 ‘원동기(오토바이) 면허증’이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에게 오토바이 면허증 딴다고 학교를 하루 빼먹는다고 하니까 담임선생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친구와 땡땡이를 쳐가며 땄던 면허증이다.

친구와 오토바이를 마음 편하게 타고 놀기 위한 나의 첫 열정이었다.

무언갈 할 때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래 이건 나랑 맞지 않나 보다’라는 등의 합리화를 통해 정신승리하면서 내 유리잔 같은 멘털과 의지 그리고 무지함을 마주하지 않고 외면한 채, 체면에 걸린 좀비처럼 아무 의미 없이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이냥 저냥 흘러갔다.



1. 내 마음의 큰 변화가 찾아온 군대 시절
자기 계발서에 중독된 20대 초반의 나, 그것이 나를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다른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제발 대학교 졸업장은 땄으면 좋겠다’라는 어머니의 간절함 바람으로 나는 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7~8등급을 넘나드는 나의 수능점수와 지저분했던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였지만 그래도 나 같은 놈도 받아주는 대학교가 있어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을 갔어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수업은 안 들어가고 매일 술만 퍼마시면서 축구만 하다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렇게 막 나가는 아들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대학생활에 의미를 느끼지 못해 결국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되었다. 정신 좀 차릴 겸 해서 인간 개조의 용광로라 불리는 ‘귀신 잡는 해병대’로 말이다.


계급이 낮은 병사를 의미하는 ‘후달 혹은 짬찌’ 시절에는 해병대 병들만의 고유한 전통이 있어 몇몇 선임들에게 다소 빡(?)시게 교육을 받긴 했지만 해병대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 지내는데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도 짬밥이 제법 차기 시작했고, 짬찌(짬밥 찌끄러기) 시절에는 선임들 눈치 보랴 일하랴, 후임들 챙기랴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군 생활의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운동도 해보고, 후임들과 장난도 쳐보고, 공부도 해보았지만 미친 듯한 무료함을 달래진 못했다.


그러다가 내 팔자에도 없을 것 같던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기 계발 서적을 읽었는데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서에서’라는 책을 시작으로 무엇에 홀린 것 마냥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한 권 두권 읽을 때마다 무언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고 나 자신이 지적이고 된 사람처럼 변해가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이라도 모든 역경과 고난을 나의 의지로 해결하여 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의 8개월 남짓 남은 군 생활을 독서로 보냈다.


나는 자기 계발서에 취해있었다. 자기 계발서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열정을 이야기하고 비록 자신이 부족한 사람일 지라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지식을 알려주었고 삶의 가이드를 제시해주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취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좋아서 나는 끊임없이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충만한 기분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가도 며칠, 몇 주가 지나서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서 정신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이 해이해질 때마다 또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나서 정신적인 안도감과 안정을 찾았다. 그렇다. 나는 자기 계발서에 중독되어 있었다.


자기 계발서는 적당히 그 저자의 생각과 인생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참고 정도만 하고 삶에 조금씩 적용해보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너무 취해있으면 정말 내가 그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책을 쓴 저자의 생각, 그의 이론, 그의 철학과 가치관은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뿅~하고 나온 게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학습 그리고 노력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기준을 만들어간 세월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만든 기준과 방법론이 나에게 100%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살아온 배경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사람마다 다르고 사람의 성향 또한 제각각이라 그 사람들이 남긴 지식과 정보를 학습하고 참고하여 나에게 맞는 기준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나는 이때 이런 생각까지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책의 저자가 하는 말을 맹목적으로 믿었고 그렇게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저 사람처럼..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 내 정신이 물 들어갔고 군대를 전역할 때쯤 나는 열정과 긍정의 에너지로 충만해져 있었다.


그리고 자기 계발서의 플라시보효과(?)를 통해 세계 어디든 정복할 용기가 샘솟았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나의 파란만장한 20대 새로운 도전들이..

솔직히 말해서 독서와 자기 계발서가 내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부정은 못하겠다. 왜냐하면 독서를 통해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고 내 생각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는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행동과 도전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술에 취하듯 자기 계발서에도 취한다는 사실을 20대 후반이 돼서야 깨달았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이 정신을 지배하고 이성을 마비시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술 마실 때 기분도 좋아진다.

이와 같이 나는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용기가 생겼고, 희망이 생겼으며 이를 통해 많은 도전과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술도 그러하듯 적당히 마시고 관계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면 좋지만 과하면 좋지 않다. 자기 계발서도 그렇다. 적당히 내 인생에 참고용으로는 좋지만 너무 과하면 자기 계발에 취해 ‘착각’ 속에 빠진다.




2.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기 위해 떠났던 아프리카 그리고 호주..


책으로만 느꼈던 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고 어딜 가던지 내 의지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전역하자마자 해외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아프리카 케냐로 1년 날아갔다.

그리고 아프라키 케냐에서 1년간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몇 개월 후 곧바로 당시 한참 유행하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 받고 호주로 날아가 2년간 살았다.

아프리카에서나 호주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이 해이해질 때마다 극약처방으로 자기 계발서는 꼭 읽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음으로써 긍정적이고 열정이 가득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고 그런 사람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모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아프리카 해외 봉사를 갔을 때 선교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봉사자 대부분이 해당 교회의 신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형제자매들이었다.

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면 ‘믿음’이라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믿는 ‘진심 어린 믿음’이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할 때 강해지는 면도 있다.

(그들이 신에 대한 믿음이 있듯이 나는 나에 대한 믿음과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성공법칙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프리카 해외 봉사도,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도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아프리카와 호주에서 총 3년간의 여정에 대해 많은 스토리가 있지만 다 말하려면 책 한 권을 써야 할 정도로 스토리가 많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녀왔다는 정도만 언급하겠다.

(시간 날 때 호주와 아프리카 스토리도 글로 써서 올리겠습니다)


어쨌든 아프리카나 호주나 다 사람 사는 곳이라 그럭저럭 살만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일을 구해서 했고, 더 나은 의사소통과 생활을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며 나름 즐거운 해외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과 조금 다른 시야(?)를 얻게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환경에 있을 때만 잠시 조금 다른 '내'가 됐을 뿐..


군대 전역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왔고,

아프리카 갔다 와서도 또 본래의 '나'로 돌아왔으며,

다른 환경도 마찬가지였다.


호주에 갔다 와서도 별반 다를 게 없는 패턴이었다.

나는 무언가 남들과는 다른 환경에 잠시 머물다 왔을 뿐 '나' 자체의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정말 본래의 '나' 밖에 없었다.

새로운 가치관도, 지식도, 인격도, 지혜도...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열정을 불태우면서 사는 듯하였지만

결국 20대 중반이 되고 난 뒤 돌아보니까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듯 느껴졌다.


호주까지 갔다 온 그때 당시까지도 나는 "나는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으니까 나는 특별해, 나는 뭐든지 해낼 수 있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오만함으로 변했고 나는 20대 초중반 띵가띵가 하며 어떤 지식이나 능력을 함양 하지 못한 채 보냈고 자기 계발서를 통한 극약처방을 통해 정신승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합리화의 늪에 빠진 채로..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란 사람은 외부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그 상황과 환경에 맞춰 잠시 자신의 모습을 바꿀 뿐.. 결국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듯했다.


또다시

게으른 나로,

주위의 시선이 두려운 나로,

멘탈이 약한 나로,

의지가 바닥인 나로.. 돌아왔다.


나에겐 중심이 없었다. 환경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은 항상 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에게 항상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처럼 포장하였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항상 나의 선택에 대해 대변하였으며,

나의 인생은 특별하다는 것을 주입시켜왔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껍데기는 페라리로 덮어 씌었는데

엔진은 오래되고 곧 고장 나기 일보 직전인 구식 엔진을 달고 있었다.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오래 달릴 수 없고 언제 퍼질지 모르는, 자동차로써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바로 내가 20대에 자기 계발에 취해 포장했던 나의 모습이었다.


아프리카 해외 봉사 그리고 호주 워킹홀리데이 등 다양한 경험을 의미 없었다고 부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해 마시길..)

아프리카에서는 교육의 중요성, 믿음의 힘 그리고 인간의 양면성을 깨달았고 호주에서는 일하면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고, 여행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웠으며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내 인생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단,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건 사실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외부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 계발서를 통해 얻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맹목적인 믿음이 때로 정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현실을 외면한 채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천운이 따르지 않은 이상 큰 노력과 대가 없이 큰 보상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책 몇 권 읽었다고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이라는 보상을 얻으려고 했었다. 거기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학습하고 살았는지가 중요하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산사람과 무인도에서 홀로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의 지식수준, 성향, 가치관, 생각이 같을 수 있을까? 나도 환경의 중요성을 많이 느끼긴 한다.

성인 이전의 삶에서는 물리적인 몸뚱이가 어떤 환경에서 있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학습한다. 태어난 직후는 흰 백지상태와도 같으며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살아가면서 얻은 정보와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그 학습된 정보가 체계화되면서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고 삶이 되는듯하다.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태어날 때부터 한 사람의 소설이 백지장에서부터 써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한 인생의 골격이 형성되는 시기가 바로 태어날 때부터 성인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매우 안 좋은 경험이나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부정적인 정보들이 가득 채워질 것이고, 이는 인격형성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그리고 성인 이전의 환경에 의해 갖춰진 인격 및 성향은 좀처럼 고쳐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인생 소설의 전체 골격이 완성된 시점에서 다시 부수고 제로베이스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각오하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되기까지의 환경적 요소는 한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과 가치관은 평생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성인이 된 직후에 아무리 새롭고 많은 경험을 해도,

결국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형성된 '나'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더라..(내가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는 인격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내 자아가 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군대 시절?

아니면 아프리카?

호주?

모두 아니다.




3. ‘나’라는 자아의 근본적인 뿌리가 흔들리게 된
대한민국 캐피탈 시티 ‘서울’에서의 삶


'나'라는 자아가 가장 변화가 있었던 시절은 별로 특별하지도 않을 것 같은 서울에서의 삶이었다.

서울을 환경적인 관점으로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보냈던 광주광역시에서 조금 더 발전되고 복잡성이 많을 뿐 똑같은 도시이자 한국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이처럼 특별할 것도 없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화가 있었을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태어난 직후 백지장에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써 내려간 인격과 가치관 그리고 성향 등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적인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라..

여기서 말하는 내적인 변화는 내 감정, 생각의 큰 소용돌이가 치고 기존에 가졌던 관념이 뿌리째 뽑혀버리고 새로운 생각이 자라나는 시점이다.

호주 생활 2년이 끝을 달리고 있던 시점에서 나는 멜버른 인근 작은 도시의 닭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도 생각보다 쉽고 호주 고용주가 운영하는 공장이라 정당한 페이와 노동시간을 보장받으며 호주 막바지에는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 끝나고 혹은 주말에 시간이 많이 남아 멜버른도 놀러 가고 같이 일하는 한국사람들과 술도 마시면서 지냈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인터넷을 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보다가 젊은 MIT 과학자가 강의한 테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라는 주제의 강의였는데 나도 이해는 안 가지만 이영상을 보자마자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희미하게 보였고, 나도 저런 세상에 편승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압도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관련 분야 강의를 보기 시작하였고 호주를 떠나고 한국에 와서 잠시 고향에 3개월 머무르면서 지속적으로 책을 사서 읽고 영상을 보면서 점점 소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물인터넷" 기술로 세상을 연결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재 IoT, AI, Bigdata 등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있었지만 내가 호주에 있을 2015년 당시에는 대부분 모르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기술을 배워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이 생겨났고 그걸 실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와 소망"이 생겼다. 전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게 관련 분야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정부지원의 IT 개발자 양성과정 8개월짜리를 교육원에서 배우기로 했다.

나는 섬에서 자라와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혜택 및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렸으며, 학창 시절에 공부를 지지리도 안 했기 때문에 기본 배경지식이 없었으며, 중퇴했던 대학교도 관련 학과도 아니며, 더 심각한 것은 남들 다 쓸 줄 아는 MS 오피스와 한글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상태였다.


막상 교육과정이 시작할 때는 정말 최악이었다.

대부분 관련 분야에서 몸담고 있었던 사람이거나 컴퓨터에 관심 있는 사람 그리고 관련 학과를 졸업했던 사람들이었다.

뭐,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였지만.. 참담했다.. 남들은 다 이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단 1도 이해 못하고 당연히 알아야 할 기본적인 용어들도 나에게는 모든 게 낯설었다.

안 그래도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 '나'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은 코드상에 점(.) 하나만 잘못 찍혀도 실행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웹사이트나 여러 프로그램들이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복잡한 구성으로 얽혀있고 이런 복잡성들이 융합되어 한 시스템 혹은 프로그램으로 동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프로그래밍 기능 및 요소들을 이해해야지만 응용 및 적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대충 몸으로 때우고 말로 때우면서 살아온 나에게는 정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간절하게 원하는 게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것 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따라가겠다는 일념 하에 교육원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매일같이 카페에 가서 밤늦게까지 복습하고 공부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진도를 따라가기 너무 힘들었다.

이해도 안 되고, 어렵고, 하나를 익히고 이해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드는데 빠르게 다음 파트로 넘어가고..

이 교육 과정 중에 만난 좋은 친구(훗날 같이 창업하기도 함)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따라가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때, 나는 또다시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무능함을 도저히 보고 있기 힘들었었다.

"어차피 나는 개발자 될 건 아니니까"... 그리고 3~4개월 만에 남 들다 프로그래밍 교육받고 있을 때 나는 교육원 구석에서 수업시간에 IoT 관련 취업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육원 이수가 다가올 시점에 나는 전혀 생뚱맞은 업종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s전자판매 / 모바일 컨설턴트"

우리가 아는 대기업 S 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남은 자존심은 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뭐 반응들이 좋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들도 굉장히 기뻐하길래 뭐 같은 서비스 분야인데 IT 모바일 관련 분야이니까 괜찮겠지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다.

컨설턴트의 직무는 S사에서 제조하는 모바일 기기(주로 핸드폰)를 디지털플라자 같은 판매점에서 컨설팅, 서비스해주거나 휴대폰을 잘 활용 못하는 고 연령층 대상으로 스마트폰 강의를 해주는 그런 업무였다.

사물인터넷 관련 개발도, 지식 습득도, 사업역량을 키우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자괴감에 빠졌고, 근본 없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내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살아왔으며 서울은 왜 온건가?라는 질문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비참하고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직을 하기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남들 다 가진 대학 졸업장마저도 나에겐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산업의 패러다임 속에 들어가려는 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그 무엇도 나에겐 없었다.


그때부터인가...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 같다. 지금까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인생을 살았구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놈에다 입만 살아있는 놈이었구나..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영어점수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스토리..?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으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그저 내 스스로 자아도취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의미 없는 것이었구나..


사회는 냉혹했고, 현실은 참담했으며, 그 당시 내 스펙으로는 도저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분야였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무언가 다시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다.

또 합리화를 통한 셀프 정신승리를 하며 광주나 고향으로 내려갈까도 고민했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으로 다시 시작해보자!라고 결심하고 8개월 동안 의미 없이 일하다가 무작정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가 엄청난 시련의 시작이었다.


컨설턴트 직무를 그만두고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물인터넷 관련 업종의 회사들을 벤처기업/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 물불 가리지 않고 입사지원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관련 분야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사물인터넷이라는 분야는 모든 사물에 센서가 부착되어 특정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네트워크를 통해 사물 간 통신하고 의미 있는 정보로 가공 혹은 가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판단/예측은 주로 인간이 했던 영역이지만 사물들이 자체적으로 예측/판단을 하게끔 하는 기술이다. 한때 붐이었던 유비쿼터스와 같은 개념이나 옛날에는 IT 인프라가 열악하여, 활성화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의 중심에 있는 기술이었다. 그렇다 보니 습득해야 할 지식들이 많았으나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구인구직을 시작하였다.


이쪽 분야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일념 하에 100개가 넘는 사물인터넷 사업을 하는 회사에 물 불안 가리고 입사지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인터뷰 제의를 오지 않았다.

또다시 불안함과 자괴감이 엄습해왔다.

솔직히 내가 회사 인사담당자라도.. 새로운 신사업분야에 관련 실무경험도, 지식도, 자격증도 심지어 대학도 졸업 안 한 놈을 뽑겠는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굉장히 심적으로 괴로웠다.

그리고 모아둔 돈이 없어서 1~2달 만에 통장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월세, 식비, 휴대폰 비만 고정적으로 60만 원씩 나가는 상황에서 인터뷰 제의조차 오지 않은 상황이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나 다른 일을 구해버리면 취업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이 되어 그냥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기회가 날 때마다 하기 시작했다.

그 힘들다는 택배 상하차도 해보고 청담동 고급 레스토랑 서빙, 철거 보조, 강남 예식장 일일 알바 등을 전전하며 일이 없을 때는 계속 구인구직을 병행하면서 2개월을 보냈다.

겨우 고정지출을 때워갈 정도로 벌던 터라. 그냥 일일알바/구인구직/IT 공부 이 패턴만 계속 반복하며 지냈다. 정말 자금적으로 힘들 때는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교통비도, 심지어 혼자 맥주를 사서 마시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한 달 정도는 편의점에서 하루 한 끼 라면에 삼각김밥으로 때우기도 했다.

서서히 지쳐가고 자괴감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초췌하고 의욕 없고 폐인 같은 모습이 비친 거울을 보며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내 심신은 망가져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웃음을 잃었고, 의욕을 잃었으며, 구직활동과 공부도 안 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몇 날 며칠을 방구석에 처박혀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내 친구들과 아는 지인들은 다들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다니고 술 마시고 놀고 있는 사진을 카카오톡 단톡 방에 올라올 때마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에게 분노를 수없이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극약처방으로 사용했던 방법인 자기 계발서를 읽어도 보고 인생/철학/성공/힐링 관련 강의 및 영상을 닥치는 대로 보았지만, 별 감흥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더 이상 자기 계발서, 좋은 말, 좋은 말씀 같은 것들로는 내 마음을 달랠 수 없었고 내가 지금까지 의지하면서 위안 삼았던 것들에 환멸감을 느꼈다"

내적으로 일어나는 검은 소용돌이가 주체가 안되어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을 때는 하염없이 집 근처 419 카페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또 집에 와서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기를 반복하였다.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정도 이런 시기를 보낸 것 같은데..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니체의 명언 중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인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조금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당시만 해도 너무 내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이 고통이 그냥 끝이 나기만을 바랬었고 내 삶에 의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이 6개월이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내적인 변화가 있었다.


나를 좀 더 제삼자의 눈으로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냉정한 현실과 참혹한 현재 내 상황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고,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고,

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숨기고 싶었던 나의 치명적인 결점과 치부를 수면 위로 올려서 보게 되었고,

이젠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내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눈에 보기 좋은 것들과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생, 철학, 가치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결국 희망에 불씨가 살아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계획하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서서히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원하는 분야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기 때문에 지원하는 모든 사물인터넷 관련 기업정보를 모아서 정리하고 기업 하나하나 맞춤형 이력서 및 제안서를 작성해서 구인구직을 진행하였다.

그러자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내가 고통의 시간 동안 보내면서 깨달은 가치관을 그대로 적용하여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직의 룰은 어느 정도 따르되, 직장 상사에게 이쁨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아첨도 하지 않았으며 비위를 맞추는 일도 하지 않았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일을 꾸준하게 하다 보니 사장님께서 어느 정도 좋게 봐주셨는지 연봉도 원하는 대로 2번 올려주고 2년도 안 된 사원에게 많은 권한을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 담당자 자리를 주시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약 3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과 내적 갈등 그리고 성장 스토리가 있지만 너무 글이 길어지기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약 3년간 일을 하다가 2019년 막바지에 퇴사를 하여 IT 교육원에서 만난 친구와 IT 회사 창업을 하고 2019년 하반기부터 2020년을 내 꿈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 불태웠다.

그리고 2020년 11월 현재 구미 스마트폰 부품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모두가 짐작할 것 같다.

창업을 시작하면서 소액 대출금, 원룸 보증금, 퇴직금과 모아둔 돈을 다 날려 먹고 방세와 휴대폰비 심지어 담배 살 돈도 없어 상황까지 가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회사를 정리하고 기숙사 제공되는 이곳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있다.

창업 도전부터 회사를 정리하고 구미로 내려와서 공장에 취직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2020년에 일어난 일이다.


2020년은 내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존의 ‘나’라는 자아가 가장 많이 변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완전히 변해버린 나의 모습이 가끔 낯설기도 할 정도이다.

나는 ‘다시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든다.

창업 도전과 실패 후 나의 감정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쓰려고 했지만 너무 글이 길어질 것 같다. 지금도 충분히 쓸데없이 글을 길게 썼다.

이때 나의 감정적 변화와 자아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고 제일 처음 썼던 글인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4. (마무리)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진정한 내적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나만의 생각을 말하려 했다. 그리고 오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외부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당신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 글을 읽어주는 나의 몇 명 안 되는 고마운 구독자 및 독자들 중에서 자신의 현재 삶과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도를 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공부를 위해 노량진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학업과 취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곳저곳 여행도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외부 환경을 바꾸는 노력을 주로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보다 변화를 갈망하였고 누구보다 외부적 환경을 극적으로 많이 변화시키며 살아온 나의 20대 여정을 통해 느낀 나만의 생각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색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색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의해, 사회적인 관념에 의해 상황에 의해
조금 그 상황과 환경에 맞는 색에 덫칠했을 뿐
결국 여러분의 고유한 색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든 호주에 있든 나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외부 환경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꿈과 소망이 생겨 올라간 서울에서의 5년 동안 살면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박탈감과 자괴감..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과 시련의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내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런 시기가 여러 번 반복되면 될수록 나는 무너져만 갔고 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내 자신에 대해 솔직해졌다. 그리고 초라한 내 모습, 빈껍데기 같은 내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나 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지 않았고 나를 포장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만의 라이프스타일과 기준을 세워나갔다. 나는 지금 내가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학벌이 좋지 않아도, 내 집과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창업을 하다가 실패한 실패자라도

이제는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이유를 대변하려고 애쓰지도 포장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의 내적인 변화로 인해 나만의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기준에 따라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기준과 통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 들은 더 이상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나는 비로소 ‘나’ 답게 사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듯하다.

서울에서 경험한 내적 갈등, 정신적 고통과 시련을 통해 얻은 선물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처한 고통과 시련 안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얼마만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이 꽁꽁 싸매기 급급했던 민낯을 수면 위로 꺼내어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에 따라 당신은 진정한 변화를 체험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이건 단순 나의 경험으로 비롯된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렇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개인의 의견만 존재할 뿐 사람들이 이 의견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 의견을 말하고자 지금까지 살았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글쓰기 미생 수준이라 이 글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할 엄두도 안 나고 가끔 이야기가 주제를 벗어나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나의 생각을 그냥 써내려 갔다.

왜냐하면 글을 수정한다고 몇 번 글을 보다 보면 왠지 올릴 용기가 안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맞춤법만 조금 확인하고 바로 올렸다.

글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 점점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다.










@별첨 : 군대, 아프리카 호주 시절 사진

나의 모든 사진이 담긴 USB를 시골에 놔두고 와서 일단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만 올렸습니다.


군대 사진




아프리카 사진







호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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