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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노동자의 삶 #2

공장 노동자의 삶을 받아들이는데 걸린 시간

by 순코딩

모든 걸 내려놓고 서울에서 구미로 내려와 공장에서 일 한지도 어느덧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 구미에 내려왔을 당시 ‘내 인생 이제 끝났구나’라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4개월이 지난 지금 내 정신과 육체 모두 건강하게 회복되어간다는 것을 느낀다.

처음 구미 터미널에 내려 메마른 잡초만 무성했던 허허벌판의 풍경도 음산하고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오래된 공장 기숙사 아파트도,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 찬 좁은 내방도 이제는 편안해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이제는 이 모든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애틋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에서 일할 때는 금전적으로 항상 부족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그나마 월급이라도 받아서 먹고사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창업을 하고 난 후에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컵라면으로 하루 한 끼를 해결하며 내 몸을 혹사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3끼를 공장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기숙사에 가서도 공장 지정식당에서 사원증으로 아주 싸게 맛난 밥을 먹을 수 있으며,

공장에서 제공하는 기숙 아파트 덕분에 서울에서 매월 45만 원을 냈었던 방세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12시간씩 주/야간 3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각종 야간수당 추가 수당이 붙어 월급도 괜찮게 받는다. 항상 대출 연체 전화와 압박에 시달리고, 휴대폰 미납 및 정지 예고 문자를 받는 게 일상이었던 서울에서의 삶에 비해 금전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또한, 서울에서 5년 살면서 휴일을 온전히 즐겨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 술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기도 했지만 항상 놀면서도 돈 걱정과 일 걱정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쉬는 날 정말 아무 생각 안 하고 편하게 쉴 수 있다.

금오산 카페에 가서 앉아 온전히 가을을 만끽하기도 할 수 있고,

공장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도 돈 걱정, 일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고,

책도 이제는 내가 필요에 따라 읽었던 IT 및 비즈니스 전공 서적보다는 내가 관심 있고 흥미를 느끼는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점은 쉬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냥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누워서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볼 때도 있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나는 이곳 구미에서, 그리고 공장 노동자의 삶을 통해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내 인생 밑바닥의 상징이었던 구미와 공장이었지만 지금은 나에게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많은 것을 준 고마운 곳이다. 정말 진심으로 이곳 구미에, 그리고 나에게 많은 걸 제공한 공장(회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이렇게 바로 이 생활에 만족하고 적응했던 건 아니다.



이 생활에 만족하고 적응하기까지 두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똑같은 업무를 12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지루함에 적응하는 시간,

공장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공장 설비들과 그 설비들이 내는 굉음을 적응하는 시간,

주야 3교대 근무로 매주 밤낮이 바뀌는 것을 내 몸이 적응하는 시간,

평소 열이 많고 답답함을 못 참는 내 몸뚱이가 방진복에 적응하는 시간,

황소 같은 내 고집에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성향이 강한 나와,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매일 나와 불꽃 튀는 신경전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팀 리더 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시간,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꿈꾸던 IT CEO가 아닌 공장 노동자가 된 지금의 내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시간,

내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를 인정하고 지금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시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다.
이 모든 걸 적응하고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달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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