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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노동자의 삶 #3

공장 노동자의 하루 그 안에서 찾은 소소한 재미와 특별함

by 순코딩


처음 공장일을 하기 위해 구미로 내려오고 두 달간은 공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내 몸과 정신이 적응하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창업 실패 후 도피의 목적으로 내려온 탓에 패배감에 젖어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처음 두 달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몸과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상의 소소함과 특별함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4달이 지난 지금 나름 이 생활에 적응하고 만족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두 달간 부정적인 생각으로 내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던 공장 생활의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특별함을 보기 시작했다.

특히 온통 사업, 성공 그리고 나 자신만을 바라보았던 나의 시야에 ‘다른 사람’ 혹은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24시간 365일 멈추지 않고 똑같이 돌아가는 공장일지라도 그 안에서 일하는 다양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지루한 공장 안에서도 소소한 재미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을 것 같은 나의 공장 노동자의 하루 일상에 대해 다룰 생각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재미와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1.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출근길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하루에 2개 조가 12시간씩 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은 항상 똑같다. 주간일 경우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야간일 경우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근무를 하게 된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서 주/야간 근무 상관없이 출근 시간에 달을 보며 출근하고, 퇴근 시간에도 달을 보며 퇴근한다.

나는 달이 항상 어두운 밤과 새벽에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장에서 일하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

달이 언제 뜨는 줄도 모른 채 30년을 살았었다.

주간/야간 어느 시간대든 항상 달을 보며 출/퇴근 한다.


나는 항상 출근 시간의 1시간 30분 전인 5시 30분에 기상을 한다.

잠을 많이 잔 것 같으면서 개운하지 않다. 주/야간이 격주로 바뀌는 패턴에 몸이 적응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나이가 먹어서 그런 것인지 잠을 중간에 한 번도 안 깨고 푹 자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중간이 한두 번씩 깨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은 2~3시간 자고 깨서 출근까지 잠을 못 자고 그대로 출근한 적도 많다. 공장에 온 지도 4개월이 지났지만 찌뿌둥하고 개운하지 못한 상태로 기상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기상 후 샤워하고 옷을 입은 다음 곧바로 기숙사 밖을 나선다.

내가 살고 있는 공장 기숙사에서 공장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다. 통근 버스가 있긴 하지만 나는 항상 걸어서 출근을 한다.

출근 전엔 항상 들르는 곳이 있다.

기숙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편의점이다.


출퇴근 전에 매일 가는 기숙사 인근 편의점


출근하기 싫은 마음을 항상 이곳에서 달래고 가는 것 같다.

여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캔커피 한잔을 사서 노래를 들으며 담배를 한 대 피운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출근하기 위해 기숙사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곤 한다.

항상 저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는 것 같다.

‘그래 나만 이렇게 일하기 싫은 것이 아니지, 저기 저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기분일 거야.. 그런데 저렇게 출근하잖아. 그러니 나도 힘내자!’ 라며 나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며 공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살짝 어두운 이른 아침과 초 저녁의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출근하는데 요즘 날씨도 제법 쌀쌀해져서 콧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와 항상 출근하면서 듣는 지브리 스튜디오 노래까지 더해져 극한의 고독한 가을 남자 컨셉충(?)이 된다.


지브리 음악과 함께 궁상 제대로 떨면서 걷는 출근길 풍경


그렇게 궁상을 떨며 노래 2곡 정도 들으면 회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회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몸과 마음은 무거워진다.

걸음은 느려지고 내 어깨는 축 늘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좀비처럼 걷기 시작한다.

얼마나 출근하기 싫은지 내 걸음걸이가 설명해준다.

출근길은 항상 블랙홀에 빠지는 기분이다.

블랙홀 같이 중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강한 힘이 작용한다. 회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강한 중력에 의해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저곳에서의 12시간은 평소보다 5배는 더 느리게 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회사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오늘도 멈추지 않고 환하게 불을 밝히며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저곳을 우리가 사는 행성인 지구와는 다른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곳인 것 같고 시간과 공간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 시공간의 방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공간의 방 앞까지 오면 다른 출근자들을 태운 통근 버스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들의 무거운 발걸음과 표정을 보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 위안을 얻는다. 그래도 출근하기 너무 싫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깊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대뇌 인다.

‘후~하아~~~~ 오늘도 12시간 잘 버텨보자!’

그리곤 정문에서 체온 체크와 사원증을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선다.


시간과 공간의 방.. 마치 블록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장(회사)으로의 입장


2. 범죄자가 된 기분으로 현장 입장(에어샤워룸)

※ 회사 입장 이후 보안의 이유로 카메라 사용 금지와 현장 입장 시 휴대폰을 들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공장 안에서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로 대체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장 건물에 들어와 내가 일하는 현장이 있는 2층에 올라가서 긴 복도를 지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수막 룸’이라는 곳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들어갈 때도 체온 체크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방진복과 방진화를 갈아 신고 제전 장갑을 끼고 그 위에 라텍스까지 2중 착용하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는 준비가 끝난다.


(※다른 현장 사진) 방진복과 방진화 및 작업 복장을 착용하는 수막룸(출처 : 에스티 크린룸)


이 회사는 아주 작은 스마트폰 카메라와 3D 인식 모듈을 생산하는 공장이라서 머리카락과 잔털 하나하나도 제품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작은 먼지 하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더군다나 보안도 매우 철통 같아서 작업자 입장에서는 한번 일하러 들어가는 데 너무너무 귀찮다.

가끔은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삼엄한 보안과 청결 상태를 체크받고 현장으로 들어간다.

보안 체크와 방진복, 방진화, 장갑, 마스크 착용을 완료하고도 현장으로 들어가려면 마지막 최종관문이 하나 남아있다.

최종적으로 몸에 남아있는 먼지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에어샤워룸이다.

에어샤워룸은 글자 그대로 바람으로 샤워한다는 의미이다.

수막 룸과 현장 사이 신발 이물질 그리고 장갑 이물질 청결상태를 체크하는 기계에 손과 발을 올려놓고 아무 이상 없을 시 게이트가 하나 열리고 에어샤워룸 문을 들어서는데 에어샤워룸은 1~2평 정도 되는 작은 방안에 온통 철로 뒤덮 혀 있고 구멍이 사방으로 뚫려 있다.


현장 입장 전 관문인 에어샤워룸 내부 모습(외부 사진) - 출처 : http://foodware.co.kr


이 구멍으로 강한 바람이 나오고 작업자들에게 붙어 있을 최종 잔털과 이물질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30초 동안 이 바람을 맞고 반대쪽으로 가는 문이 열리는데 드디어 내가 일하는 현장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내가 처음 이 에어샤워룸에 들어왔을 때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마치 외국영화에서 보면 범죄자들이 감옥에 들어갈 때 방 하나에 다 처박아 놓고 소독을 시키는 장면이 떠올랐고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본 적 있는데 나치가 포로수용소에 유대인을 가두고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일에 쓰임새가 없어진 유대인들을 샤워실로 속이고 가스실에 가둔 다음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 에어샤워룸에 들어왔을 땐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 또한 적응해서 여기 들어올 때마다 구멍에 얼굴을 갖다 대고 시원한 바람을 30초간 즐기기도 하고 양팔을 벌리고 혼자 타이타닉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빙의를 하기도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상황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다른 상황으로 만들 수 있다.

똑같은 에어샤워룸에서 나는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의 유대인이 된 것 같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지만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어떤 환경에서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수용소 가스실(출처 : http://www.ohmynews.com)과 영화 타이타닉 명장면(출처 : https://pusyap.com)


3. 내가 공장에서 하는 일


에어샤워룸을 통과하고 이제 부품 생산 현장에 입장하는데 입장하는 순간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많은 종류의 생산 설비들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초반에 여기를 들어왔을 때 이 장엄한 풍경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손톱 크기의 쥐콩만한 센서 하나를 만드는데 이렇게 많은 종류의 설비가 필요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일하는 공정에 도착할 때까지 어림잡아 1000개가 넘는 설비를 보는 것 같다.

이 설비들이 센서를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굉음을 들으며 5분 정도 걸어가면 내가 일하는 곳에 도착한다.


이 공장은 스마트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의 부품을 생산하는데 여기에 있는 작업자들은 대부분 설비의 오류를 체크하고 설비를 가동하는 일을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설비를 보는 건 아니고 다양한 공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부품에 결함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검사하는 공정에서 일한다.

그리고 나는 현미경을 통해 검사하는 검사원은 아니고 검사원을 통해 검사가 완료된 최종 합격품을 전산에 입력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에 몇 십만 개의 부품이 생산되는데 여기에서 하루 생산되는 모든 부품을 전산에 최종적으로 입력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상부에서 지시한 수율을 맞추는 일까지 하는데 나름 바쁘고 복잡한 일을 맡고 있다.

불량을 검사해야 하는 공정이다 보니 육체적으로 많이 힘든 일은 아니지만 꼼꼼하게 현미경으로 마이크로 단위까지의 불량을 검출해야 하는 꼼꼼한 작업을 요하는 일이라 그런지 작업자 대부분이 여성분들이었다.

지금은 남자 검사원도 채용했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 이 공정에서 남자는 나 혼자였었다.

그렇게 나는 출근하자마자 검사가 완료된 부품을 자체 전산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일을 시작한다.

12시간 동안, 쉴 틈 없이,

4. 쉬는 시간 시작엔 우사인 볼트, 끝날 땐 나무늘보로 변하는 사람들


하루 12시간 근무에서 쉬는 시간은 15~40분까지 총 4번이다. 쉬는 시간에 식사가 2번 제공된다.

출근하고 첫 시간은 2시간이다. 2시간 일을 하고 나서 대략 20분 정도 휴식시간이 주어지는데,

휴식시간 1분 전부터 진풍경이 펼쳐진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던 일을 멈추고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방진복의 숨겨진 기능은 누구든지 귀요미로 만드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이든,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방진복을 입혀놓으면 온순한 곰 인형으로 변한다.

관리자를 제외하고 모든 일반 작업자들은 흰색 방진복을 입는데 휴식시간 1분 전에 흰색 곰인형들이 하나같이 ‘내 휴식시간은 내가 지킨다!’라는 결의에 찬 눈으로 시계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미어캣들이 무리 지어 있는 집단에 이방인이 나타났을 때 단체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이 귀엽다.


쉬는 시간 1분 전 우리의 모습(출처 - 픽사베이)


그리고 휴식시간이 땡 하는 순간, 공정 안에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데 5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공정은 생산된 제품을 검사하는 마지막 공정이기 때문에 위치도 맨 끝에 위치한다.

그래서 휴게실에 가기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수막 룸까지 가야 하고, 수막 룸에 가서도 방진복을 벗는데 시간이 또 걸린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1분이라도 더 자신의 꿀 같은 휴식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숨도 안 쉬고 휴게실까지 달린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이 우사인 볼트가 된다.

더군다나 공장 안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로 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뛰는 속도와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빠르다.

여기서 느는 건 작업 스킬 만이 아니다. 경보 능력도 향상되는 듯하다.

나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이다.


처음 진풍경을 본 나는 ‘어차피 걸어가나 뛰어가나 얼마나 차이가 있다고 저렇게들 열성적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휴식시간마다 그들과 경쟁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현장에 다시 들어가는 장면 또한 재미난 볼거리다.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와 같이 휴게실을 가던 모습과는 다르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밍기적~밍기적~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이 모습은 마치 나무늘보와 같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고 장난을 걸기 시작한다.

아쉬웠던 짧은 휴식시간의 여운을, 일하러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현장에 들어가는 길에서 달래는 듯하다.


휴식시간 전후의 사람들의 모습을 비유하자면

휴식시간이 시작될 때는 우사인 볼트가 되고,

휴식시간이 끝날 때는 모두가 나무늘보로 변한다.

이것 또한 재미난 볼거리며, 보고 있으면 귀엽다.


우사인 볼트(왼쪽 사진 중앙) 과 나무늘보 - (출처 : 픽사베이)



5. 식사 메뉴만으로 30분 토크가 가능하다.


12시간 근무 중 2번의 식사가 제공되는데 대부분 첫 번째 식사시간에 밥을 먹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식사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는 시간대라 거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모두가 첫 번째 식사시간을 눈 빠지게 기다린다.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모두가 허기져 있는 상태에서 식사와 30분 쉬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몰라도 첫 번째 식사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현장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 전산 입력용 컴퓨터에서 식사 메뉴를 확인하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 메뉴에 대한 열띤 토크가 시작된다.

나는 맨 앞에서 정신없이 전산 입력을 하고 있다가도 어느샌가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식사 메뉴로 이어질 수 있는 大 토크와 대화의 흐름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자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남몰래 큭큭 대고 있는 날이 많다.

어떻게 식사 메뉴 같은 별것 아닌 주제로 저렇게 수다를 이어갈 수가 있는지,

정말이지 남자들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늘 메뉴 저번 주에 먹었는데 진짜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휴일에 먹었던 맛집 얘기로 전환되었다가 갑자기 다이어트 얘기로 전개되더니 마지막에는 눈썹과 미용 관련 수다로 이어진다. 눈과 손은 현미경을 응시하며 불량을 검출하고 있는 동시에 입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대고 있는 모습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능력인 멀티(Multi)가 안된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내 눈과 귀 그리고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만 집중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대화를 한다거나 이일을 하면서 동시에 저 일을 못한다. 그래서 현미경을 보며, 손은 핀셋을 들고 부품을 이리저리 돌리는 동시에 머리와 입은 점심 메뉴로 시작된 수다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멀티 신공에 경외감마저 든다.


갑자기 3년간 몸담은 IT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 그곳은 15년 이상을 함께한 창업멤버 3명을 주축으로 대부분 40대 이상의 나이로 구성된 업력 20년차의 IT 중소기업이었다.

그곳에서 점심시간 토크는 단 10초면 충분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사장님 혹은 부장님들이 다가와서 한마디 건넨다.


“종순아 이제 슬슬 점심 먹으러 가야지? 오늘은 뭘 먹어야 하노?
“그냥 (사내식당) 먹던 거 먹죠”
“그래 밥 먹으러 가자”
“네”


10초는 무슨.. 5초면 충분했다.


토크계의 전설 하면 떠오르는 오프라 윈프리 그리고 국내에서는 국민 MC로 유명한 유재석이 있는데, 토크계의 전설들을 굳이 TV에서 찾을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별거 없는 점심 메뉴 하나로 30분 재미있는 토크가 가능한 이들이 나에게 있어,

진정한 토크계의 전설들이다. 항상 진정한 고수들은 우리 주위에 있기 마련이다.



6. 눈은 과학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눈을 통해 한 인간의 상당 부분을 어느 정도 캐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작업자들이 방진복과 마스크를 착용하며 일하기 때문에 눈 밖에 안 보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성격, 감정, 그리고 첫인상 등을 판단할 때 주로 그 사람과의 대화 혹은 표정을 통해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감정과 표정,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생각은 언제든지 왜곡이 가능하다.

잘 웃는 사람, 인상이 좋아 보이는 사람인 ‘척’ 할 수 있고,

인생을 힘들게 살아온 사람,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지적이고 고상한 사람인 ‘척’ 만들 수 있다.

우리의 말과 표정은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고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표정과 말을 통해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눈을 보면 알 수 있고,

지금 기쁜지, 슬픈지, 우울한지 감정 상태 또한 눈을 보면 알 수 있고,

이 사람이 어리바리한 지, 똘똘한지, 게으른지, 개구쟁이인지 눈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눈은 거짓말을 못하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내가 갑자기 미래를 생각하다가 기분이 우울해진 적이 있었다.

그 우울함은 출근해서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일할 때 최대한 우울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기분이 좋은 척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오빠, 오늘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형, 오늘 포정이 너무 무서워요..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좀 피곤해 보인다? 아니면 기분 안 좋은 일 있나?”


많은 사람들이 내 눈을 통해 내 감정을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최대한 아닌 ‘척’ 하며 내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눈은 거짓말을 못 하나보다.

어쩌면 방진복과 마스크로 온몸과 얼굴이 뒤덮인 채 눈만 보이는 것이 얼굴 전체를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깊은 내면을 관찰할 수 있으며 더 정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말과 표정은 거짓말할 수 있어도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은 과학이었다’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 눈은 과학이었다. -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7. 퇴근은 공허함과 마주하는 시간


반복적이고 똑같은 것 같지만 똑같지 않은 시공간의 방에서의 12시간 혈투를 끝마치고 공장 밖으로 나오면 아침 7시, 혹은 저녁 7시가 된다. 아침과 저녁 완전히 상반되는 시간이지만 일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주간이든 야간이든 똑같이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

그리고 해가 짧아진 요즘, 야간이든 주간이든 상관없이 항상 달이 떠 있는 모습을 보며 퇴근을 한다.

내가 사는 기숙사와 공장은 걸어서 10분 거리이기 때문에 항상 출근할 때는 걸어서 오지만 퇴근할 때는 통근 버스를 이용한다. 걸어가기엔 이미 내 체력이 바닥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통근 버스를 타고 기숙사 근처에서 내리는데 나는 항상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기숙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편의점(CU)에 들러서 스타벅스 캔커피 한잔에 담배를 피우고 퇴근 시간의 여유와 기쁨을 잠시 만끽하고 들어간다.


출/퇴근 전에 항상 캔커피 사들고 담배를 피우는 장소(기숙사 인근 편의점 앞)


담배 1~2개피를 피우고 난 후 곧바로 기숙사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다 말리고 나면 개운하고 나른한 상태가 되면서 뭔가 모를 자유로움을 느끼며 이부자리에 눕는다.

퇴근 후 기쁨과 자유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잠시, 방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눕고 양팔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에 올린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이 드는데

이때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공허함과 마주한다.


퇴근 후 공허함과 마주하는 시간


“지금 눈을 감고 일어나면, 또 출근 준비를 하고 12시간 반복적인 일을 한 다음 또 지금 이 시간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잠이 들겠지..

이렇게 똑같은 일-잠 패턴을 4번 반복하면 이틀 꿀맛 같은 휴일을 보내고 휴일이 끝나면 또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겠지.."


언제까지 이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시간을 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하거나 공부를 하려고 해도 공장 생활에 지친 내 몸과 게으른 내 정신상태를 보면 그럴 엄두가 안 나고 그렇다고 이런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곳에 안주하게 될 텐데.. 더 늦어지면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는 있을까?..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이런 무한정 반복되는 일상을 그냥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등등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더욱 공허해진 채로 잠이 든다.

그리고 또다시 내가 지금까지 써내려 온 하루의 삶이 똑같이 반복된다.

이것이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나의 하루 일상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일상에서도 많은 감정과 생각이 올라오고

기쁨과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공허함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새롭게 해주는 것은 공장에서의 일이 아닌,

사람들 간의 관계 안에서 생겨나는 감정과 생각의 다채로움인 것 같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하루를 의미 있는 하루로 만드는 것,

그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무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사소한 일상이라도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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