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우리 가족에게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는 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던 시간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편안했던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체계적인 관리하에 안전하게 계셨고,
'요즘 요양병원은 잘 되어 있으니 걱정 마'라는 말에 우리의 마음을 기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창살 없는 감옥에 있는 죄수와 같았다.
웃음을 지을 때, 찰나의 행복을 느낄 때도
할머니가 눈 뜰 때마다 했던 말이 우리의 온몸을 자극했다.
"인쟈 집에 가자"
곁에 없는 할머니에게 죄짓는 마음만 가득했다.
우리는 9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집'이 답이라는 것을
"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
9년 전, 아빠는 다른 선택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집으로 왔다.
엄마와 동생이 집에서 직접 재활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의 몸 기능이 떨어졌고,
결국 혼자 거동이 아예 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아빠를 동생 몸에 묶고, 엄마는 뒤에서 받쳐주며 운동을 했다.
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퇴근하면 동생 몸에 묶은 아빠와 함께 집 앞 산책을 했다.
집안의 공기는 차가워졌고, 대화는 사라졌다.
"잔말 말고 같이 살자."
우리의 사정을 알고 한달음에 달려와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였다.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우리의 식사를 챙겨주시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일 뜨거운 물로 아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찜질을 해주고,
정신적으로 다독이고 지지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버텨냈고,
결국 아빠는 스스로 몸을 움직였고,
우리는 일상을 살아갔다.
'집에서'
그때 우리는 알았다.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의 힘을
집이라는 공간의 치유력을
할머니의 움직임이 조금씩 있을 때부터
엄마와 나, 동생은 집으로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사촌들의 반대와
혹여나 집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를 하지 못하게 될 까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집으로 와서 재활해야 해"
요양병원에 가신지 5개월이 되어갈즈음, 여전히 할머니의 눈뜬 시간을 짧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확고한 마음만큼 어른들의 반대도 완고했다.
"아빠 때와는 완전 다를 거야"
"가족들이 너무 힘들 거야.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거야"
"갑자기 아프시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그렇게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집 앞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하나같이 빌었던 것 같다.
"제발, 할매가 집에 와서 계실 수 있게 해 주세요. 제발"
요양병원 간호사 선생님이 보내준 영상 하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작은 기적의 불씨를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새해인사를 한 간호사 선생님에게 답을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또렷하지 않지만 떠 있는 두 눈으로 답을 하는,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이한 할머니의 생신
새해 영상의 여운이 남은 사촌들과 우리 가족들은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갔다.
할머니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만 계셨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의 말에 작게나마 반응을 했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을 했다.
"집에 가자."
간절한 바람과 또 다른 작은 기적은
커다란 기적을 만들어주었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모시자. 너희가 고생할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마음이 급해졌고, 급한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방문 간호를 알아보고,
간호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할머니의 상태, 퇴원을 해도 괜찮을지,
필요 물품이 무엇이 있을지 물었다.
복지용구 침대와 휠체어를 대여하고,
당시 드시던 경관식을 구비하고,
기저귀, 패드, 물티슈 등 필수품만 챙겼다.
그 과정에서 요양병원의 의사는 극심한 반대를 했다.
"이 상태에서 집으로 가시면, 안락사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었다.
아빠의 시간을 통해 배웠으니까
'집'이 답이라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끝까지 우겼다.
사설 구급차를 부르고
병실에서 할머니가 내려왔다.
전 날 저녁은 설렘이 가득 차 잠이 오지 않았고,
눈 뜬 아침 창밖은 유난히 날이 맑아 보였고,
꼭 소풍 가는 날 아침 같았다.
"할매 이제 집에 가자"
병실에서 내려 온 할머니가 잠깐 눈을 뜰 때
우리의 말을 들으셨는지 얼굴이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사설 구급차와 나란히 집으로 오는 길은
꽃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을 하고,
간호사 선생님께서 잠시 들러 할머니 상태를 봐주시고,
우리의 기적이 실행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한테 갔다.
얼굴을 만지고, 손을 만지고,
엄마는 자다가 몇 번을 깨서 확인했다고 했다.
어둠이 드리웠던 엄마의 얼굴에도 밝은 빛이 생겼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너무 행복했다.
"힘들지 않을까요?"
수 없이 들었던 말이다.
지금도 수 없이 듣고 있는 말이다.
요양병원은 분명 안전한 곳이다.
의료진과 요양보호사님들과 같은 전문가들이 있고,
가족들의 마음은 덜 지치게 해 준다.
반면 집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
전문가가 없는 시간이 더 많고,
가족들이 지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집'이라는 곳은 정답이다.
할머니가 살아온 공간의 익숙한 냄새가 있고,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가족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집'에서
이제는 우리가 할머니를 지킬 차례이다.
뜨거운 물로 찜질도 하고, 식사도 챙기고,
곁에서 대화도 하고, 체온을 느끼면서
그리고 2년, 그 시간 동안 쉽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고,
회복과 재활, 전쟁 같은 일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집'에서 울고 웃으며 계신다.
우리는 작은 기적으로 기적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