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호자가 아닌 방문자였다.

요양병원의 보호자가 되어 알게 된 것들

by 순담

8년 전, 엄마와 나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우리는 요양원에서 실습을 하며 간접적으로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 우린 보호자가 아닌 돌봄 제공자였다.


2년 전, 할머니의 8개월 간 요양병원 생활로

우린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방문자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방.문.예.약.

할머니를 보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방문할 시간을 예약하고,

그 시간이 되어야만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항상 예약 시간보단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코로나의 기승이 조금은 풀렸지만

여전히 코로나의 위협은 강력했기에

도착을 하면 방문자 이름, 연락처, 환자와의 관계를 쓰고 코로나 간이 검사를 했고,

그동안 데스크에서 병동간호사실에 미리 연락을 했다.


"준비가 덜 돼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친절한 목소리로 매번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마주한 할머니의 모습은

말끔했다.

옷도 깔끔했고,

눈에 눈곱하나 끼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내가 궁금했던 준비는

할머니가 우리를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준비였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우린 꾸며진 할머니를 매번 봤다.


그렇게 우린 보호자가 아닌 방문자가 되어있었다.




할머니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고,

조금씩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좌측 편마비가 오면서 팔과 다리 구축으로

손은 오므려지고, 골반은 밖깥쪽으로 틀어졌다.

팔과 손을 주무르며 재활운동을 조금씩 시키고,

다리 스트레칭을 하는 것은 방문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저.. 선생님, 혹시 팔, 다리 재활은 들어가는 거죠?"

몇 번의 방문과 며칠의 고민 끝에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봤다.

"네, 오전에 팔, 다리 재활하고 갑니다."

확인할 수 없는 답변을 듣고 우리는 믿어야만 했다.


의식이 많이 돌아와 눈 맞춤을 하고,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했다.

"물 도"


할머니의 한마디는 우리에게 축제였지만

한순간에 우리의 축제는 끝이 나고 씁쓸해졌다.


"저희 할머니께서 물을 찾으시는데,

거즈에 물을 좀 묻혀서 입에 대어 드리고 싶은데 거즈가 있을까요?"

"아, 저희가 챙겨드릴게요."

친절한 답변,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의 움직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제한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소변줄, 콧줄, 산소를 하고 있기에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 모습을 보는 건 답답했다.

너무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는 잠깐이라도 팔과 다리를 풀어 주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할머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주무실 때를 제외하곤 움직 일 수 있는 온몸을 움직이며 침대에 문지르듯 했다.

문지르는 곳의 옷을 걷어보면 벌레에 물린 건지 두드러기 인지 빨갛게 뭔가 올라와 있었다.

"할매, 왜 그라노? 왜 이렇게 몸을 문때는데?"

"지그럽다, 너무 지그럽다"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자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과 함께 연고를 가지고 오시더니 발라주셨다.

"나이 드시면 이유 모를 피부트러블이 많이 생기는데, 어르신 같은 경우는 모든 면역체계가 떨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가 덜 간지럽게 하는 연고 발라 드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할머니의 피부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매번 같은 답변에 답답한 우리는 직접 사진을 찍고,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가입한 카페에 질문을 남겨 보니 '옴'인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믿기 힘든 충격에 사진을 들고

주변에 있는 피부과를 갔다.

"손가락 사이에도 이런 발진이 있으면 옴이긴 한데... 사진만으로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할머니가 퇴원하는 그날 까지도 '옴'이라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옮았고,

2년 넘게 고생을 하고 있다.




보호자가 아닌 방문자이기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먼저 물어야만 대답을 해 주었다.


할머니 몸에 열이 나서 물어보니, 아침에 열이 올라서 해열제를 드렸다.

소변 색이 좀 이상해서 물어보니, 피검사 요청을 해 놓았다.

의식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아 물어보니, 의식이 분명하지 않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시스템.


할머니의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처치가 들어갔는지,

우리가 왔을 때 먼저 말을 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답답한 마음에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우리 할매, 미움만 받게 되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묻기만 했다.




불만이 쌓여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적은 인력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에

간호사,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의 노고가 많다.

이러한 병원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스템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병원에 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할머니 곁에 머물다 나왔다.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가 없는 그 시간의 할머니는 마음껏 움직이지도 못한 채

천장과 벽을 그림 삼아 바라보기만 했을 것이다.


이건 우리 할머니만의 얘기는 아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계시던 많은 어르신들의 모습과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분들의 보호자들도 우리와 같은 방문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것을 알아가는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무력감'이 지금 우리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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