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의 1년
지금도 집으로 모시고 온 첫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주택이지만 약간의 계단이 있는 우리 집.
사설 구급대원분들이 고생하며 할머니를 침대로 옮겨주셨고,
콧줄과 소변줄을 하고 있는 할머니는 움직일 때 잠깐 깨고 다시 잠드는 시간이 길었다.
오후에는 방문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혈압, 산소와 피부상태 등 체크해 주셨다.
그렇게 완전한 우리 식구가 모인 집이 되었다.
언제나 처음은 낯설듯
우리의 첫날, 처음은 조심스러웠다.
뇌경색 발병을 하고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콧줄로 경관식을 드리고, 소변을 체크하고, 체위변경하는 법을 배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개월 만에 다시 하는 우리는 익숙한 듯 낯설었고, 조심스러웠다.
분명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부족한 것들도 많았다.
그럴 땐 불만, 불평도 없이 서로 앞다퉈 사러 가기도 했다.
할머니의 자리가 비워진 8개월,
다시 채워진 할머니의 자리.
완전체가 된 우리 가족은 뇌경색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그날부터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이가 들 수록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뇌경색 이전, 아니 뇌경색으로 쓰러지던 순간까지도 일을 하던 할머니.
앉아서 티비를 볼 때도 항상 손에는 마늘 까던, 콩을 고르던 바삐 움직이는 손,
추운 겨울에 밭일이 없을 때도 새벽 4시 일어나 추운 방에 미리 보일러를 켜놓고,
주무실 때를 제외하고, 엉덩이를 붙이는 시간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많던 할머니였다.
부지런함이 몸에 녹아있어서 그런지
좌편마비로 와상(?) 상태가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침상 위의 할머니는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바쁘셨다.
콧줄을 만지는 것은 기본!
소변줄도 손을 대려고 하고,
어떻게 몸부림을 치셨는지 몸을 사선으로!!
편마비 다리가 침대 밖으로 빠지는...;;
(낙상할 정도로 위험한 자세는 아닙니다! 낙상은 사전에 원천차단 한답니다!)
그럼에도 손과 발을 묶고 싶지가 않았기에
우리는 조금 더 정신이 없는 생활을 자처했고,
우리의 시선은 항상 할머니에게 가 있었다.
그러한 선택 덕분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할머니와 대화를 자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요거트로 연하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예상보다 빠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콧줄이 막히게 되면서 조금은 빠르게 콧줄을 제거하게 되었고,
소변줄도 제거하게 되었다.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혹여나 소변이 잘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우리의 걱정이 무색하듯 요의를 잘 느끼셨다.
식사도 사레에 잘 들리지 않고, 안전하게
아이들 이유식처럼 죽을 만들어 잘 드셨다.
콧줄과 소변줄은 없어졌지만
그만큼 자유로워진 할머니 덕분에
시끌벅적하고, 바람 잘 날 없는, 그러나 행복이 묻어나는 집이 되었다.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 간호, 처치를 위해
방문 간호사 선생님이 매주 3번 집으로 방문을 해 주셨다.
간호사 선생님은 할머니 간호를 하시면서 말을 계속 걸어주시고,
우리에겐 할머니에게 꼭 해야 하는 것들과 약 복용법 등
돌봄을 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우리의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매번 지지해 주시는 것도 빼놓지 않으셨다.
"첫날부터 맥이 조금 이상하였는데, 혹시 병원에 가보실 수 있으면 방문하여
부정맥 검사를 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일주일이 지날 즈음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해 주셨다.
다음 날 병원을 방문하고,
입원하여 검사를 실시했다.
"지금 할머니 심장은 시한폭탄이랑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정맥이 너무 심한 상태,
저칼륨, 고 나트륨... 전해질 불균형이 심한 상태,
치료를 위해 2주간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가족은
왜 요양병원에서는 알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요양병원도 병원인데
8개월 동안 요양병원에서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지...
답변을 들을 수 없는 의문만 커져갔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1년은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닥쳐왔고,
집에서의 생활 절반, 병원에서의 생활 절반으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은
매 번 가족들의 심장을 조여오듯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도 함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집이었기에,
가족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 순간들을 잘 이겨 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사촌들도
오히려 요양병원의 시간을 후회하고,
집에서 모시는 지금의 순간을 너무 좋아하고 있다.
"그때 바로 집으로 모실 걸..."
"만약 요양병원에 계속 계셨으면 아마 할머니가 지금은 안 계시지 않았을까 싶어..."
"그래서 너무 고마워"
우리 가족이 선택한 돌봄의 방식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돌봄'에서 완벽은 찾을 수 없다.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생기게 되고,
상황에 맞게, 각자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이기에,
가족이 있기에
'포기'보다는 '도전' 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집에서 함께 재활을 하고,
집에서 함께 웃고 우는 것
그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할머니가 되었다.
39kg였던 할머니는 현재 55kg이 되셨고,
알아듣기 힘들었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현재 집의 오디오를 책임지고 계시고,
오른팔과 오른 다리만으로 휠체어를 타고 온 집을 누비며 돌아다니신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
여전히 당황스럽고 힘들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분명 한결 건강해졌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굳건해진 사랑이 커졌다.
지금의 순간이 오기까지는
기적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확신한다.
집이 답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