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who you choose to be
1학기 종강을 앞둔 16주 차,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L은 갑자기 나에게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을 걸었다. L은 수업뿐 아니라 대학 내 다양한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언제나 즐겁게 잘 지내는 아이였다. 특히 댄스 동아리 활동으로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SNS 플랫폼에도 댄스 챌린지 영상을 올리며 즐거운 대학생활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처럼 지내왔다. 그런 L이 진지한 말투로 갑자기 상담 신청을 해서 놀랐다.
“교수님, 저 어떡하죠?”
종강하고 연구실에 찾아온 L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L은 고등학생 때 회화를 하다가 입시미술을 준비하여 예술디자인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학에 온 뒤 1학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고민이 많았지만 결정이 힘들었고, 고민이 될 때마다 다른 활동을 하며 걱정을 미뤘다고 했다. 어느새 3학년이 된 지금, 더 이상은 걱정을 미룰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잠시 미뤄둔 걱정도 여전히 걱정은 걱정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마주하지 않고 미뤄둔 걱정의 무게는 날이 갈수록 자꾸만 커졌다. L은 현시점에서 휴학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L의 휴학을 반대하신다고 했다. 퇴직이 가까운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 지원을 할 때 대학을 빨리 마치라는 것이었다.
L은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못 잡았는데,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막막하기만 한데... 이대로 괜찮은 건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 졸업해도 될까요?”
시간이 흐르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불안이 엄습했다.
동아리 활동으로 학과 행사로 바쁘게 지낸 L이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더욱 커져만 갔다. 고등학생 때 생각했던 대학생은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너무나 자유로울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회적 구속과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지위’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만 되면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찬란하고 밝은 미래가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만 되면!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마법의 단어 대.학.생.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그렇게 환상 속에서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생만 되면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막상 대학생활을 하다 보면 지독한 불안이 쌓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커지는 불안 속에서 1학년, 2학년이 지나고 어느새 3학년… 이제 남은 대학생활이 지난 대학생활보다 짧은 시점을 지나게 된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L'homme est condamné a être libre.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축복이 아닌 형벌이라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선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이 동반된다고 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우리가 이 '불안'을 회피하기보다는 자유에 따른 필연적 불안임을 인정하고, 주체적인 선택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The Incredibles>(2004), <Ratatouille>(2007), <Mission Impossible Ghost Protocol>(2011)로 유명한 브래드 버드 감독의 데뷔작 <The Iron Giant>(1999)는 지구에 떨어진 외계로봇과 주인공 호가드의 우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You are who you choose to be."
우리는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존재이다. 모든 순간순간의 선택이 모여 내가 된다. 결국 어떤 내가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외계로봇은 살인병기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슈퍼맨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바로 작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올해의 대학생들은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의해 내 삶의 주인이 나였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책임의 무게가 불안으로 엄습한다. 낯선 불안에 당황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불안은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현재를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무언가를 성취하며 불안과 함께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어느새 지금 여기에서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L은 휴학을 결심했다.
L에게는 지금 1년의 휴학이 너무나 필요한 상황이었다. 비록 1년의 짧은 휴학 기간일지 모르나 잠시 멈추어 자신의 위치를 찾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