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공저로 참여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마나나의 가출 /원제: my happy family>을 보고 글을 썼습니다.
<우리 같이 볼래요?>
<출판사 서평>
밤 열 시,
‘육퇴’하고 시작하는 같이 혼자서 영화 보기
모두 잠든 시간, 집안일과 돌봄에서 겨우 벗어난 엄마들은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져도 쉽게 잠들 수 없다. 귀하디 귀한 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상에 쫓겨 희미해지는 진짜 나를 또렷이 마주할 순간이다. 고립된 엄마들은 혼자서 동영상 서비스에 접속해 같이 영화를 본다. 그러고는 영화 이야기인 듯한 내 이야기, 내 글인 듯한 영화 에세이를 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B급 며느리’와 ‘B급 시어머니’가 만나고, 맞벌이 부부의 주 양육자라는 자각에 힘들어하고,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하고, 나만을 위한 작은 사치를 부리기로 결심한다.
부너미가 쓴 엄마들의 영화 이야기는 세 가지 해시태그로 갈무리된다. 1장 ‘조조할인’에서 엄마들은 〈우리 집〉, 〈기생충〉, 〈가족의 탄생〉, 〈보이후드〉, 〈우리의 20세기〉, 〈결혼이야기〉, 〈톰보이〉, 〈B급 며느리〉를 본다. 2장 ‘심야 영화’에서 만나는 엄마들의 영화는 〈툴리〉, 〈펭귄 블룸〉, 〈박강아름, 결혼하다〉, 〈남매의 여름밤〉, 〈레볼루셔너리 로드〉, 〈벌새〉, 〈소공녀〉, 〈욕창〉, 〈케빈에 대하여〉다. 3장 ‘주말의 명화’에 담긴 목록은 〈82년생 김지영〉, 〈찬실이는 복도 많지〉, 〈디 아워스〉, 〈마나나의 가출〉, 〈안토니아스 라인〉, 〈비포 미드나잇〉, 〈블랙 위도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크루엘라〉다.
구호보다 공감으로
가부장제를 흔들고 나를 찾아가기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웹툰 〈송곳〉에 나온 이 대사처럼 같은 영화도 결혼, 임신, 출산, 양육이라는 경험을 통과한 뒤에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관 스크린에서 거실 텔레비전이나 서재 노트북으로 보는 장소까지 바뀐 지금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날 선 구호보다 느린 공감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우리 같이 볼래요?』는 부너미가 지금까지 낸 두 책처럼 강하고 도발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 않다. 온라인으로 좀 더 많은 엄마들이 모여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엄마들의 일상에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누구나 고개 끄덕일 만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감을 끌어내는 힘을 지닌 예술이고, 공감에 바탕한 이야기들은 좀 더 쉽게 전달되리라 믿은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짧은 글들이 가부장제에 제기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영화가 아니라 삶을, 내 삶에 스며든 영화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이 볼래요?』는 기혼 여성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려 노력한 결실이다.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아내, 엄마, 딸, 며느리 같은 ‘정상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기혼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다양한 영화를 매개로 느낀 감동과 기쁨, 혼란과 좌절, 희망과 실천적 노력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영화 평론가나 학자가 엄마의 삶을 분석한 글은 뭔가 불편한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 같이 볼래요?』를 함께 쓴 우리의 목표는 결혼 제도 바깥에 서 있는 여성들까지 포함해 영화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가는 일이다.
* 북토크때 했던 이야기의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영화를 보며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소란스럽고 번잡한 집 안에서 마나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누구도 마나나에게 그녀의 생각이나 의견을 묻지 않는다. 그리곤 어떤 필요나 기대, 욕망이 가득한 얼굴로 마나나를 바라본다. 그런 가족 안에서 마나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로지 엄마, 아내, 딸로서만 존재한다. 소설가 이명랑은 이런 말을 했다. “무언가를 끌어안기 위해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용서를 하고, 누군가는 감사를 한다.” 마나나의 독립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가족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끌어안기 위해, 그들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 남들과는 다른 조금 더 용감한 선택을 한 거라고.
어둡고 침울한 마나나의 얼굴.
마나나의 선택이 독립이었다면, 나의 선택을 읽기와 쓰기였다. ‘나’를 찾겠다고 발버둥 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선택과 경험을 했지만 결국엔 이렇게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글을 쓸 때 느끼는 해방감이 좋았다. 그래서 썼다. 지금도 마음이 복잡할 때, 별거 아닌 일에 무너지는 때, 이유 없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루를 맞이할 때, 아이들 때문에 괴로울 때, 드라마 정주행을 끝내고 마음이 저릿할 때, 남편이 미울 때, 이유 없이 기분이 좋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면 글을 쓴다. 물론 아직은 타닥타닥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날보다, 빈 화면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 괴로움에 몸을 떠는 날이 더 많지만 괜찮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시간을 내어 책상에 앉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이미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한 달의 두 번 휴무를 빼면 매일같이 엄마의 국밥집에 나가 서빙을 하고, 여름이면 남편의 복숭아 농장에 나가 포장을 하고, 그 와중에 4남매의 학원 픽드랍과 집안일을 홀로 다 해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한때 나는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애국자였다. 매번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리고, 남편과 어머니의 도시락을 싸다 주는 예쁘고 착한 사람, 아들을 셋이나 낳은 대단한 새댁, 혼자서도 육아와 살림을 척척 해내는 만능 재주꾼. 그럼에도 넷째가 어린이집에 가게 된 날, 나는 ‘집안에 들어앉은 여자’가 되었고, 동시에 ‘심심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규정지었다. 나를 애국자라 칭하던 어른들은 나를 보면서 쯧쯧쯧 혀를 찼다. 독서모임을 하는 내게 누군가는 팔자가 좋다고 했고,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책이나 읽고 싶다고 했다. 그런 말을 견디며 읽고 썼다. 삶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지 않아 했던 선택이 이젠 나를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고, 이루고 싶은 작은 바람이 되었다. 그게 참 좋다.
정답고 평온했던 집의 엄마로 살아갈 땐 하고 싶은 일은 없고 해야 하는 일만 많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나오니 해야 하는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해야 하는 일도 미뤄둔 채 하고 싶은 일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해야 하는 일 중에 ‘나’를 위한 일은 없었다. 될 수 있다면 앞으로도 해야 하는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매일 책상 앞에 앉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앉는다. 책을 읽지 못할 만큼 피곤해도 책을 펴고 앉았다 침대에 나가떨어진다. 글을 쓰지 못해도 노트북을 열었다 닫는다. 그렇게라도 나를 놓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더 읽고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나아간다. 특별하게 완벽한 하루보다 서툴고 부족한 하루가 더 많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나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모여 결국엔 내가 바라던 ‘나’에 닿을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마나나는 가족 밖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조금 더 용감한 선택을 했을 뿐. 내게서 나를 빼지 않아야 각오를 다지지 않아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