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게 무해한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어지는데,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지나간 마음과 흘러간 감정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다. 그 안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끝나지 않은,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그때의 우리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정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나도 모르게 타인의 삶을 흔들었던 위태롭고 불안했던 우리.
작가는 그렇게 사랑뒤에 숨긴 서늘한 마음을 들춰내지만 그것을 실패라 말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안엔, 때론 불손하고 어그러진 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우리가 있다. ‘끝’이 아니라 ‘시작’에 있던 우리. 불안하고 거칠지만 동시에 애틋하고 따뜻한 마음을 품었던 우리. 서로에게 온전히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어 보이던 우리가 함께 존재했다. 나는, 그런 마음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책을 읽었다. 관계의 소멸이 우리에게 남겨둔 상처와 쉽게 지워지지 않은 꿉꿉한 슬픔 앞에 버티고 선, 결국엔 ‘사랑’에 가닿고 싶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열여덟 이경과 수이의 사랑을 그린 <그 여름>을 읽으면서, 나는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를 떠올렸다. 친구와 나는 매일 아침 함께 등교를 하고, 하교 후엔 번갈아가며 서로의 집에 놀러 가 라디오를 듣거나 숙제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용돈을 모아 똑같은 옷을 사 입기도 했고,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엔 기차를 타고 바닷가로 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그때의 우린 이경과 수이 같았다.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었고, 매 순간 함께 이길 바랐다. 그 마음이 사랑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우정은 사랑 못지않게 밀도가 높아서 우린 지독하게 서로를 좋아했다. ‘연약하지만 맹목적인(p307)’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친구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아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내가 널 생각하는 만큼, 내가 널 위하는 만큼 똑같은 크기의 관심과 사랑을 받길 원했다. 때문에 함께여서 기뻤던 순간만큼 서운하고 슬펐던 날들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러면서 조금씩 멀어졌던 것 같다. 나는 수이가 없는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경처럼, 친구의 부재 속에서도 생각보다 잘 지냈다. 아니, 사실은 잘 지내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면 ‘네가 없어도 나는 괜찮아, 잘 지낼 수 있고 잘 지낼 거야’ 같은 생각들로 나를 위로하느라 애써야 했고, 그런 날엔 어김없이 마음이 상하곤 했으니까.
그런 마음을 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그건 지는 것 같았고,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친구를 향해 네가 그립다고 말하는 대신 ‘초연하고 외로운(p112)’인간이 되기를 택했다. 그때는 몰랐다. 마음이란 것이, 내어준 만큼 돌려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걸.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어쩌 면 내가 전부 내어주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조차 실은 주지 못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진실로 내어준 마음이라면 돌려받을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고 만다.
서늘함을 따라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보다 더 못난 마음이 있다. 친구를 향했던 알 수 없는 질투와 적의. 나는, <모래로 지은 집>에 나왔던 모래의 얼굴처럼 ‘깨끗한 표정, 어떤 망설임도 불안도 없는(p118)’ 친구의 얼굴을 사랑했었다. 웃을 땐 반달이 되는 눈, 볼 위에 옅게 퍼져 있던 주근깨, 동그랗고 작은 코, 연갈색의 눈동자까지. 해사하게 빛나던 친구의 얼굴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오래도록 보고 또 보고 싶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건,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이라서 가끔은 친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놀라움과 기쁨밖에 모르는 사람처럼(p223)’ 마냥 해맑은 얼굴로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면, 그 미래에 나도 함께 존재하길 바라면서도 너무 쉽게 미래를 낙관하는 친구가 철부지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문에 겉으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래를 향했던 나비의 마음처럼 ‘네가 뭘 알아, 네가 뭘.(p127)’ 같은 구겨진 목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는 애써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친구에겐 너무 쉽다는 것이 슬펐고, 슬퍼서 화가 났다. ‘치명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므로 마음껏 다정할 수 있는(p180)’ 친구의 삶이 부러워서 가끔은 친구도 나만큼 아프고 외롭길 바랐다. 친구를 사랑하면서도 친구가 너무 행복해지지 않길 바랐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던 걸까. 그런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나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못난 마음 때문에 스스로에게 여러 번 실망감을 느꼈다. 친구를 나 자신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눠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런 마음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친구에게 등을 돌린 진짜 이유였는지 모른다. 친구를 좋아하면서 가졌던 ‘이해할 수 없는 악의(p307)’를 숨기고 싶어서 친구의 마음을 멋대로 저울질하고 도망갔는지도.
스스로를 기만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했던 미주처럼 그렇게라도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
최은영의 글은 그때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조금은 비겁하고 어리숙했던 혹은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던 그때의 나. 그런 내 곁엔, 그럼에도 나를 오랫동안 좋아해 주고 견뎌주었던 친구가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주는 식이 아니라 해가 빛나듯, 비가 내리듯, 그저 그렇게 마음으로 내려오는(p278)’ 다정함으로 내게 온기를 나눠주었던 친구. ‘우리’라는 따뜻한 말로 몇 번이고 나를 안아주었던, 한때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
지금도 나는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p209)’이면 친구를 떠올린다. 기억 속 친구는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다. 함께 있을 때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정한 시선과, 봄날의 햇살처럼 반짝이던 웃음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다. 푸석하고 건조한 마음 한 귀퉁이를 몽글몽글하게 만들어 주었던 애정 어린 시선. 그것에 기대 견딜 수 있었던 무수한 날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는 왜 몰랐을까. 받는 줄도 모르고 받는 사랑 때문에 먼 훗날에도 너를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이제는 알아도 돌려줄 수 없는 마음이라 조금은 서글퍼지지만, 대신에 난 앞으로도 계속 친구를 그리워하려고 한다. 친구를 그리워할 때면 고이는 애틋함과 사랑, 고마움을 잘 모아서 친구가 내게 그랬듯 한 없이 다정한 마음으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위태로웠던 한 시절을 딛고 서서 누군가를 더 깊이,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관계의 소멸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에 가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동그랗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