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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Feb 11. 2020

희극의 법칙

사랑할수록 한 걸음 멀리서.


결혼식이 끝나고 노인은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앉혀두고 조금은 신이 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날 결혼식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세밀한 부분을 조목조목 꺼내 늘어놓았다. 친척 누구의 물색없는 한복 색깔, '니 친할미'의 경우 없는 행동, 사돈총각의 싸가지 없는 태도, 아비의 인사성 없음을 내 면전에 툭툭 던지고서는 마치 나의 엄마가 그 자리에 없다는 양 '네 엄마가 팔병신이라 그렇게 무시하고 고깝게 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지' 말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얼른 쳐다봤다. 엄마의 입꼬리는 조금은 굳어있었지만, 그 가시 같은 말에 반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치 스스로 인정하듯.

할머니도 말을 참. 엄마가 왜 팔 병신이야.

내 목소리는 떨렸다.
엄마의 왼쪽 팔은 눈에 띄게 얇고 약했다. 아니, 오른쪽이던가? 그 팔에 대해 물으면 부러진 곳이 제대로 아물기도 전에 또 부러지면서 약해졌다고 말해준 적도 있고,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한 적도 있는데 무엇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엄마는 그 팔로 못하는 것 없이 남들 하는 건 다 해오며 살았다. 엄마의 엄마가 '팔병신'이라는 표현을 하기 전까지 나는 엄마의 얇은 팔을 잊고 살았다.


나는 다시 노인을 쳐다봤다. 검버섯이 잔뜩 핀 얼굴에는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살았다는 으스댐이 드러났다. 세상에는 노인의 맘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듯했다. 노인은 따지고 지켜야 하는 경우와 예절이 많다고 믿는 세대였다.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얼마나 허례허식인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노인에게 잔류해있는 이 양반 의식은 가끔 귀여웠고 대부분은 성가셨다. 특히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이면, 바쁜 부모를 대신해 나를 키워준 노인에게 남아있는 애착과 의리만이 내 궁둥이를 바닥에 붙여둘 뿐이었다.


나는 세상에 수많은 화목하고 다정한 가족들의 그림을 떠올렸다. 문득 질투가 났지만, 진실이란 질투할 거리도 못된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같기만 한 인생사처럼, 가족사 또한 한걸음 멀찍이 바라봐야 더 아름답다. 나의 결혼식이 정확히 그랬다. 미워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모여 악수를 하고 웃으며 덕담을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날 좋은 야외 결혼식과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봉합되지 않은 상처들, 희생, 반목과 괄시를 얇은 천으로 덮어두고 그 천 위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꼴이었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노인이 내뱉은 '팔병신'이라는 단어 표면 아래에는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딸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 등이 아무렇게나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해결되지 못한 해묵은 감정들을 탈탈 햇볕 아래 털어 잘 말린 후 고이 묻는다면 뒤탈이 나지 않지만, 축축하고 꾸깃꾸깃한 채로 대충 묻혀진 경우 지금처럼 뾰쪽한 말로서 툭툭 발아한다. 나는 제대로 매장되지 않은 감정들 틈을 부유하는 단어가 튀어나올까 두려워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한걸음 떨어져서 나의 가족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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