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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Feb 05. 2020

네일아트를 한 할아버지의 하루

일기라면 일기고 소설이라면 소설인 이야기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요상하게도 자동차에서 바라보는 그것보다 더 평화롭고 시적이다. 햇살은 햇살대로, 빗방울은 빗방울대로 더 아름답다. 그 흔들리는 커다란 차 안에선 책도 잘 읽히고 글도 잘 써진다. 책을 읽다가 조금 머리가 아프거나 멀미가 나면 버스에 탄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언젠가는 뽀얀 민머리에 하얀 꽃을 꽂고 홀홀 웃는 이가 없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오늘은 털이 북실하고 두툼한 팔뚝에 메두사 문신이 있고, 왼쪽 엄지손톱에만 화려한 네일아트를 한 할아버지를 보았다. 조금 흥미로운 사람을 관찰할 때면 그의 삶도 상상해본다. 한가로운 수요일 오전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장바구니를 들고 탄, 네일아트를 한 노인. 아마 그의 귀여운 십 대 손녀가 그의 손가락 중 하나에 그저 네일아트 연습을 했다는, 그런 단순하고 귀여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K드라마 민족의 후예인 나는 좀 더 깊이 상상한다.(게다가 네일아트의 수준도 상당히 프로페셔널했으므로.) 그는 제대로 된 신발이 아닌 소위 쪼리라 불리는 슬리퍼를 신고 있으니 사무실에 출근하는 입장은 아닐 듯하다. 할아버지의 뒷목과 팔뚝은 거북이의 피부 같다. 겁 없이 햇볕에 끊임없이 노출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다. 그의 장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시내의 한 항구에는 매일 장이 열린다. 그는 아마 시장에 갈 것이다. 시장에서 코코넛과 뿌리채소, 토마토 같은걸 사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겠지. 버스에선 왼쪽 엄지 손가락을 긁적이며 한없이 창밖을 볼 것이다. 그는 마당에 앉아서 크고 묵직한 코코넛용 칼로 껍질을 깨고, 코코넛 과육을 긁어낼 것이다. 코코넛 과육은 커리에 넣어도 좋고 케이크에 넣어도 맛있는데, 나는 말려서 스낵 칩처럼 먹는 게 제일 좋다. 나는 그가 질 좋고 향기로운 채소들을 찾길 바랬다. 하지만 내 상상은 전적으로 상상일 뿐이다. 그는 일터로 향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원에서 친구들을 만나 페땅끄(pétanque)를 하며 오전을 보내고 점심식사를 할지도. 그는 항구 근처의 역에서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내렸다. 또 봐요, 무슈! 이렇게 내적 친구만 늘어가는 뉴칼 외국인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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