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료된 여권
기간이 지난 여권이 나에게 말한다
게으르다고
겨울만 되면 방구석에 들어와 겨울잠을 잔다
생각이 정지되고 살이 불어난다
이유는 하나라고 결론지었다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
여름에 태어나 여름이 좋다
겨울 추위를 엄청 무지 아주 싫어한다
올 겨울은 방구석에서 겨울잠을 제대로 자고 있다
만료된 여권을 보면서 정신이 살짝 들었다
많이 든 건 아니다. 살짝이다.
내일은 만료된 여권을 갖고 재신청하러 가야겠다
겨울잠을 꼭 집에서 자는 법도 없고
겨울이 싫으면 따뜻한 남쪽나라로 찾아서 가면 된다
더 이상 수동적으로 계절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돈이 많지는 않지만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갈 정도의 능력은 된다
당장 딸린 식구가 있는 것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권만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 좋은 점 중 하나(두 개, 세 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물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지금 당장 좋은 점이 떠오르지 않지만...)는 비자를 받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나라가 127개이나 된다는 것이다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스페인, 폴란드, 독일, 프랑스, 태국, 말레이시아까지 고작 10개국 두 번간 나라도 있고 도시로 치면 더 많지만 고작 10개국을 다녔구나
오사카, 교토, 고베, 난징, 항주, 소주, 상하이,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모스크바, 샹트페테르부르크,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리스본, 베를린, 파리, 푸켓, 쿠알라룸푸르 도시로 20개구나
새 여권을 받으면 더 많은 나라를 더 많은 도시를 더 많은 사람들을 다니고, 만나면 좋겠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겨울에는 겨울잠을 잔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3분의 1은 겨울에 여행을 했다
이미 입춘도 지났다
봄이 오기 시작했고 곰도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어이 권순정
그만 웅크리고 일어나지
만료된 여권을 만지작 거리면서 잡생각이나 하지 말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