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책의 서두보다 앞에는 유명한 대중작가들이 쓴 꽤나 긴 추천사가 있다. 보통 이러한 추천사는 책의 띠지에 장식처럼 한두마디가 들어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책의 앞머리에 추천사를 담다니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허지웅 작가, 이다혜 작가, 남궁인 작가 등 여러 유명 작가들이 작성한 추천사는 고심의 흔적이 엿보였다.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라면 상당히 성공적인 듯하다. 최소한 나는 이 추천사들을 보고 책을 골랐으니 말이다.
빛은 출발할 때부터 어디 도착할지 알고 있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방향을 수시로 고쳐야 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은 그렇게 고칠 때가 임박한 나 같은 독자와 만났을 때 저력을 발휘한다. 독자들이 이미 들어 보았을 종류의 조언 - 지나치게 영적이거나, 본성에 반하라고 요구하거나, 새삼스런 동기부여에 매달리는 것 - 과 달리, <두번째 산>은 주변 세계와 함께 더불어 삶아가려는 태도가 어떻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내 삶에 기쁨과 목적을 제공하는지 설명한다. (허지웅 작가의 추천사 중)
책의 요지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저자는 인생에서 '행복'과 '기쁨'을 나누어 정의한다. 인생의 첫번째 산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행복'이다. 반면 인생의 두번째 산에서는 경이로움이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을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행복을 즐기되, 이를 넘어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기쁨은 자기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데에서 나온다. 즉, 타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바로 생존이라는 첫번째 산을 넘어 도달해야 할 인생의 두번째 산이자 이 책의 제목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공동체주의의 시대를 살았으나, 공동체주의는 이제 완전히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 준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주로 강력한 능력주의 또는 실용주의와 결부되는데, 이렇게 능력주의나 실용주의에 매몰되는 경우 불안정한 과잉성취자가 되기 쉽다. 스스로 미션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냉담하고 무관심한 일중독자가 되며, 온전히 인생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과 영혼은 현재와 먼 곳에서 부유할 뿐이다. 과제를 쌓아가며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누르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치적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속적 성공을 제외한 삶의 의미를 질문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대답하지 못하거나 주입된 대답만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외로움, 공허함, 믿음의 상실이 강력한 부족주의를 야기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나 소속감을 과거 조상들의 본능에 따라 특정한 부족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족은 대부분의 경우 적대적이고 배제적인 성향을 갖는다. 그래야 구성원들에게 강렬한 소속감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족주의는 공동체주의의 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증오와 혐오에 토대를 둔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결국 사람들의 외로움과 공허를 달래주기 위한 전쟁공동체나 다름없는데, 정치, 빈부, 성별, 종교, 인종 등 집단간 갈등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고독이든 공허이든 전쟁이든, 계곡에 빠진 사람에게는 고통이 찾아온다. 고통의 단계에서는 먼저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하며, 새로운 자아가 떠오를 수 있도록 낡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고통이 첫번째 산의 밑바닥과 이기주의를 깨부수며, 이 순간에서 공감과 헌신, 관대함 등의 중요성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방종이자 텅빈 항아리이며, 우리는 온전히 몰입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의미가 필요함을 깨닫는 것이다.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기 쉽지 않은데, 고통을 통해서 자아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두번째 산을 오를 준비가 끝난다.
저자는 우리가 인생에서 오를 수 있는 두번째 산으로서 직업, 결혼, 철학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를 예시로 든다. 위의 내용의 반복이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이 함께 제시된다. '나'를 중심에 두는 고정관념에서 나아가, 직업공동체, 가족, 사상과 종교, 지역사회나 국가를 대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충분히 경청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는 그간 수많은 철학과 종교에서 궁리 끝에 다다른 진리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실천의 방법은 여전히 어렵고 모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