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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 May 29. 2024

『새벽』 - 물결이 만나는 시집 (파도시집선 014)

독립출판물 읽기

제목 새벽 (파도시집선 014)

저자 길보배 (편집인)

임나하

사백

김가희

열망

백선화

정성주

이도희

유연

김지음

염채민

소운

기봄빛

유경지

이유로

박솔

이부

박화우

최규민

이서록

김하민

지원

오연우

이제

녹무

나나

유술

정지우

윤신

강랑

박하

이예란

백우미

소은

규빈

추단비

김윤진

임서윤

오진서

백건영

홍여진

지구

리아

강지수

은노래

사각지대

김리을

느루

권나영

정그믐

오은총

강혁 

창유

출판사 파도

발행일 2023-12-22




독립 출판사 ‘파도’가 2020년부터 이어온 프로젝트 〈말투〉는 매 분기마다 공개적으로 투고받은 시를 선정해, 시집으로 엮어 출판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시인 한 명이 저자로 참여한 기존 시집과 다르게 많은 수의 아마추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출판사는 프로젝트 <말투>의 기획에 관해 ‘각자 고유한 말투가 있는 것처럼 각자의 생각, 감성, 표현을 공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 <말투>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본 게시물에서 살피는 『새벽』은 파도의 열네 번째 주제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성 출판사의 ‘시인선’과 다르게, ‘파도시집선’은 ‘바다’ ‘구원’ ‘영원’ ‘ 다정’과 같이 한 가지 주제어를 콘셉트로 한다. 일종의 시 앤솔러지*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학의 진입장벽을 낮추고자 하는 출판사의 의도가 잘 반영된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파도시집선의 매력은 이 다각도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것


출판사를 잠깐 소개하자면, '파도'는 투고를 통해서 대부분의 원고를 얻으며, 이를 통해 문학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자 하는 독립 출판사다. 작품의 콘셉트는 대게 일상의 사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금까지 발행한 출판물로는 열다섯 권의 ‘파도시집선’과 두 권의 소설 앤솔러지가 있다. 출판사 파도는 홈페이지와 SNS를 운영하며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북페어를 통해 독자들과 자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파도시집선은 전체적으로 단순한 느낌의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독자가 시집에 몰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표지 디자인과 내지 편집에 세세한 디테일을 두었다.


책을 집어들면 독특한 모습의 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시인들의 이름과 시집의 번호, 제목이 모두 형압으로 쓰였다. 그 때문에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글자를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이 어슴푸레한 매력이 ‘새벽’ 혹은 ‘편지’와 같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시집의 콘셉트와 잘 어울린다.




표지 앞날개에 자리한 한 줄의 소개글

'파도와 파도가 만나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처럼'이라고 쓰여있다.


앞날개


뒷날개에는 특이한 안내문구가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시집의 마지막 공백 페이지에 직접 시를 써 책을 완성시켜 보라는 권유다. 그리고 실제로 시집의 마지막 면인 114쪽은 새하얗게 비워져있는데, 출판사는 목차에도 이 공백 페이지의 쪽 번호를 새기는 디테일을 첨가했다.



뒷날개
본문 114면(왼쪽) / 목차(오른쪽)


이외에는 시인의 이름을 각 쪽번호의 앞에 쓰인 것과 ‘동짓날’로 쓰인 판권지의 발행일 부분이 눈에 띈다. 이렇듯 파도시집선은 판권지나 책날개까지 뻗어나가는 세세한 만듦새가 인상적인 시집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일도 내일의 해가 뜬다니



사진의 시는 이유로의 <희망행 탈선 주의> 중 일부다.


‘황혼을 꿈꾸던 일기장의 소녀야 이제는 여명조차 이기지 못하는구나’로 시작하는 시는 마치 동이 터오르는 새벽,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시간에서 초조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마지막 구절이 매일 새벽마다 하는 푸념이랑 똑같아서 기억에 남는다.



잠과 사랑은 원하지 않을 때에만 찾아온다고




이 시는 윤의 <나는 불면증 환자였는데>다.


불면증 환자였던 화자는 연인의 곁에서 잠자리에 들던 때를 떠올린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것은 잠과 사랑 모두 원할수록 멀어진다는 가슴 아픈 공통점. 화자를 두고 잠에 곤히 들어버린 연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시는 그 자유로운 형식 때문에 아마추어와 전문 작가의 간극이 제일 좁은 장르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전문 작가로 여겨지는 시인들조차 계속해서 아마추어로 돌아가야하는지도 모른다. 시를 짓는 일은 내면의 어린아이를 집요하게 깨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인 시리즈로 발행되는 파도시집선은 전문 작가와 아마추어, 시인과 어린 아이의 물결이 만나는 바다이자 사이를 잇는 가교다. 우리는 이곳에서 시인의 이름이나 이익이 아닌 시의 열정과 진실성이 교차됨을 본다.


따라서 파도시집선에 포함된 몇 페이지의 공백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빈 공간을 시로 채우고 싶은 마음, 이것이 아마추어의 예술 작품인 파도시집선의 시작이자 완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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