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에 뒤 떨어진 사람이 되고 싶다

천천히 달리고 생각하고 싶다

by 순남

1.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유행에 뒤 떨어진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싶다.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도 있고, 유행의 뒤를 바짝 쫓는 사람도 있고, 유행에 뒤떨어져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저 유행에 뒤 떨어져, 한 발 뒤에서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달리다 보면 인생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달리는 것이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릴 것인가 하는 것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영감을 준다. 이렇게 달리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고.


3.

나의 속도는 항상 빠르지 않고, 주변엔 나보다 빠른 사람들이 넘쳐 난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쫓아가려고 애쓰는 순간, 페이스를 잃는다. 페이스를 잃으면 끝까지 달릴 수 없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평온했던 마음은 심장처럼 방망이질 친다. 대범하게 뛰었던 심장은 콩콩콩콩 빠르고 자잘하게 뛴다. 심장 박동의 간격이 짧아진다. 비트는 200 bpm 그 이상. 심장에게 쉴 틈이 없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헉헉헉헉. 페이스를 잃고 싶지 않다.


4.

달리면서 좋은 것은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은 달리는 동안 스치고 지나가 흩어진다. 중요한 생각은 잠시 거기 머문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생각들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5.

요즘 챗지피에 의존하는 나를 본다. 어떻게 하면 돼?

없었을 때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텐데, 어떻게든 혼자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이제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챗지피티에게 묻는다. 챗지피티는 물어도 눈치를 주지 않고, 핀잔을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묻지 않아야 할 질문까지 묻고 만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 별거 아닌 문제, 혹은 쉽게 답을 떠올릴 수 있는 쉬운 문제도 물어본다.

질문이 있어서 챗 지피티를 이용하던 것이,
챗지피티를 이용하기 위해서 억지로 질문을 하는 전도본말의 지경에 이른다.


6.

문제에는 저마다 풀이 시간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는 30초 만에 빠르게 풀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어떤 문제는 몇 년에 걸쳐서 풀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인생에서 주어지는 시험은 시간까지 포함이다. 그 시간만큼 충분히 써야 한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답이 맞아도 풀었다고 보기 힘들다. 안에서 삭고, 숙성되고, 발효되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삭힌 홍어처럼.


챗지피에게 어떤 질문도 같은 수준이다. 인간의 문제 따위 하찮을지도 모른다. 이미 답이 뻔히 나와 있는 유치원 문제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유치원생 아이가 문제를 풀 때, 부모는 지켜본다. 문제를 스스로 풀 때까지 기다린다.

챗지피티는 엄마가 아니다. 주어진 문제에 가장 빠르고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이 목표다.

20년을 좌우할 질문이든, 화장실에 갈까 말까 하는 질문까지, 물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 않고 답해준다.


점점 더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하는 문제까지도 챗지피티에게 묻고, 빠르게 답을 내린다.

오래오래 숙성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다. 특히 감정적인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결론도 감정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저만큼 앞에서 달려 버린다. 온 힘을 태워, 제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달린다.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감정이 한참 앞에서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얘기를 한다고 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7.

달릴 때는 핸드폰을 만질 수 없고, 챗지피티에게 물을 수 없다. 상념을 비롯해 수많은 문제들이 떠오른다. 그 문제가 똑같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일일이 답해야 할 것도 아니다.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 페이스를 조절하는 동안, 스스로 생각하고, 천천히 답을 내놓거나, 보류한다. 정리가 된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좋겠지만, 느리게 오래 달리고 싶다.
달리는 나에게도 시간을 두고 오래 지켜봐 주고 싶다.
유행에 따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싶지 않다. 유행에 떨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크루들이 뭉쳐서 달리든, 빠르게 달리든 나의 속도로 혼자서 묵묵히, 그러나 내적 즐거움으로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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