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계획이 아니라, 계기로 결정된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퇴사를 수십 번 했다.
물론 실제로 회사를 나온 건 아니다. 일기장 속에서, 메모 앱에서, 마음속에서만.
일 년에도 몇 번씩 ‘이번에는 진짜’를 붙인 퇴사 계획을 세웠고, 며칠 뒤 조용히 지웠다. 계획은 늘 그럴듯했다. 재정은 이렇게, 일정은 저렇게, 혹시 모르니 플랜 B도 하나쯤. 문제는 그 모든 계획이 나를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제야 알았다. 계획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계획으로는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계획이 아니라 **계기**로 일어났다.(갑작스러운 고백이나 첫 키스를 비롯한 인생의 중요 이벤트이란) 준비는 오래 했지만, 마지막 스위치를 누른 건 늘 우연처럼 찾아온 사건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느 날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프랜차이즈 기업의 마케팅 팀장 자리 제안이었다. 직급도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그 시점의 난 회사에 마음이 많이 닳아 있었다. 회사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고, 상사인 마케팅 이사는 예고 없이 감정을 폭발하곤 했다. 회의실에서 별것 아닌 말에 분위기를 뒤집곤 했다. 웃다가 사무실이 흔들리게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대비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면접을 봤다.
합격했다. (얏호..)
합격 소식은 반가워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안도 대신 묘한 공허가 찾아왔다.
합격 통보를 받은 뒤, 나는 멈춰 섰다.
‘내가 진짜 원한 게 '진짜' 이직이 맞나?’
사실 2년 전, 전 회사를 그만둘 때 다짐했었다. 잠시 쉬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자고. 사회라는 구조가 나와 맞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퇴사하기도 전에 이직 기회가 생겼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전에,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도태가 두려웠다. 인생에서 탈락한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이름만 다를 뿐인 같은 레일 위로 올라왔다.
그 뒤로 종종 내가 **누군가가 조종하는 게임 캐릭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따로 있고, 나는 화면 속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존재 같은 기분. 살아지고 있을 뿐, 살고 있다는 감각은 희미했다.
이번 이직 제안도 그 흐름의 연장이었다.
어쨌든 현 상황을 정리해야 했기에 회사에 솔직히 말했다. 이직을 고민 중이라고. 그러자 회사는 새로운 선택지를 하나 더 내놓았다.
“힘들면, 휴직하고 쉬었다 와라.”
그 말은 친절했고, 동시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선택지가 세 개나 되었다. 이직, 휴직, 퇴직... 감사한 일이다. 애초에 선택지조차 없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선택지가 늘어나서 결정은 더 어려워졌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둘 중에 하나 고르기도 힘든데, 셋 중 어느 쪽도 명확한 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냉정하게 나를 들여다봤다.
이직은 쉼이 아니다. 휴직은 쉼이지만 미완의 쉼이다.
면접을 본 이유를 곱씹어보니, 그건 커리어 전략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웠다. _나는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인가? 여전히 시장에서 가치가 있긴 한가?_ 누군가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기준을 ‘쉼’에 두자, 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퇴...퇴...
그래도 퇴직은 두려웠다. 그 다음 장은 공백이 되기 때문이다. 이직이나 휴직과 달리, **직장이라는 구조 자체에서 내려오는 선택**이니까.
퇴직을 상상하면, 길이 끊긴 지도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반면 이직과 휴직은 여전히 레일 위였다. 목적지는 다르지만, 안내판은 친절했다.
문제는 내가 더 이상 그 레일 위를 달리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길이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모두가 달리는 트랙이 더 이상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빠르지 않아도 되고, 신발에 흙이 묻어도 되는 길로.
부산에서 행사가 있어 출장을 갔고, 부산에 있는 대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는 3년 전 이미 일반적인 삶의 규격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후회 없어. 굳이 있다면, 더 빨리 자유로워지지 못한 걸 후회하지.”
지금 그는 아날로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수입은 불안정하다. 그동안 모은 돈이 거의 바닥났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표정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해. 회사를 다닐 때는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녔어. 그런데 지금은 사진을 찍으면서, 어떻게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그게 쿠팡 알바가 되든, 뭐든. 예전엔 돈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부가적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벌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계획은 끝내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나를 움직인 건 갑작스러운 이직 기회였고, 친구의 한마디였다.
나는 퇴직을 선택했다.
잘한 선택인지, 잘못한 선택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선택은 내가 직접 흙바닥으로 걸어 나온 선택이라는 것.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늘 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