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깨졌을 뿐, 나는 그대로입니다
옛말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몇 달 전 보이스피싱으로 일순간 목돈을 날리고 빈털터리 신세로 결혼을 준비하느라, 하는 수 없이 가족들에게 손을 벌렸을 때. 코는 물론 온몸이 깨지는 듯했다. 몇 날 며칠 동안 가해자의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감은 눈 안으로 그날의 악몽이 반복될 때. 잊히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곤욕이었다. 사고로 큰돈을 날렸는데도 아무 탓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해준 지금의 남편에게는 고마웠지만, 사고 이후에도 건재한 일상은 위안인 동시에 회피하고 싶은 풍경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을 뒤흔든 그 사고가 벌어진 공간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글 쓰고 밥을 먹던 테이블에서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하던 그녀를 비롯해 검사를 사칭하던 남자와 통화한 것 모두 같은 공간이었다. 금융 사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누명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모든 순간의 기억이 집안 곳곳에 선명히 쌓여 있었다. 안락한 보금자리가 순식간에 기피하고 싶은 공간으로 변했다. 열심히 모은 돈을 허망하게 잃었고 전산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속아서 받은 대출에 없던 빚만 늘었다.
몸은 뉘어도 마음은 편치 못한, 당장 떠나고 싶은 양가감정이 드는 이 집을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불행한 상처의 흔적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것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을 왜 비켜가지 못했는지 탓해보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것 없이 몸과 마음만 곪아서, 애써 과거를 벗어나 현재를 살기 위해 노력했다.
결혼식을 석 달 앞두고 당한 불의의 사고로 주변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도 제대로 못했지만 넘치는 축하 속에 무사히 마쳤다. 또 이사 계획은 틀어졌지만 전셋값 인상 없이 재계약 성사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그날의 악몽을 잊어갔다. 아니 현실적으로 이 집을 떠날 수 없으니 여타의 감사한 것들로 요동치는 마음을 잠재웠다. 사고 직후 나를 향해 겨눴던 숱한 화살로 구멍 난 자리에 가족의 위로를 연고 삼아 바르고 다시 힘을 내 일상을 살아내며 숨을 골랐다.
다만, 보이스피싱을 당할 때 들었던 명상음악은 다시 듣지 못했다.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 누명을 벗겠다고 발품 파는 동안 마음을 다스릴 요량으로 들었던 그 음악이, 혹시라도 겨우 안정된 마음을 헤집어 놓을까 봐 애써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방문한 지인 집에서 예기치 않게 사고 당시 들었던 그 음악을 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인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가만히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해 보라는 말과 함께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요가 동작을 알려주었다. 일순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고 파노라마처럼 아픈 기억이 되감아졌다. 마치 눈앞에서 깨진 거울을 보듯이 산산조각 났던 일상들이 불현듯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픈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던 그때 마음이 제동을 걸었다. 평소처럼 소리를 외면하며 눈 감으려던 찰나, 과거로부터 아프게 건너온 다리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고 깨진 거울은 붙일 수 없듯이, 이미 모든 일은 벌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더 이상 과거로 소환되고 싶지 않았다. 무턱대고 두려워하며 피하던 음악은 예상대로 감은 눈 안으로 깨진 거울을 직면하게 했지만, 더는 힘없이 과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 간절함으로 나를 아프게 한 찰나의 시간이 힘없이 스러지기를 바라며 내어 맡겼다.
일부러 외면했을 때는 아프게 쿡쿡 찌르는 것 같던 음악 소리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고 보니 그저 소리에 불과했다. 통증을 유발하는 것은 소리가 아닌, 실재를 바로 보지 못하게 가리는 덮개가 주는 공포였을 뿐. 고통의 시간은 이미 찰나로 저물어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스스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에 과거를 영원히 반복할 뻔한 내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 그 무엇도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결국 막연한 공포였던 그 음악을 다시 듣게 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툭하면 과거로 되감아지는 기억에 마음이 냉탕과 온탕을 오갔을 뿐. 나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보이스피싱을 당했고 그 사고를 겪었지만, 과거는 나를 괴롭힐 힘이 없으니 내 모습은 달라질 것 없이 그대로였다. 사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나는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마음을 바라보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았다.
지금껏 스스로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는 죄책감에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간 명상음악을 듣지 못했던 건 나를 속인 가해자들이 떠올리기 싫어서가 아니라, 바보같이 그들에게 속아서 전 재산을 날려버린 나를 용서하지 못해서 마음이 괴로웠음을 알았다. 혼자서는 볼 용기가 나지 않던 과거의 나를, 부드럽게 마주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사고는, 그냥 그런 일이 내게도 일어난 것일 뿐.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해방감에 눈물을 쏟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명상음악에 얽힌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내 마음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울컥했다는 말로 진심 어린 위로를 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렀는데도 남편은 울어도 된다는 이야기로 나의 긴 긴 울음을 대화처럼 가만히 들어주었다.
얼마 뒤, 말없이 나를 품에 안으며 위로를 전하던 그녀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일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며 자기 마음을 전했다. 나 역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말 못 한 몇 개월 동안 홀로 마음의 지옥을 살면서 나 자신을 얼마나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알았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지옥을 살았지만 본질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나를 바로 보지 못하게 가리던 덮개를 걷고 나니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깨진 거울은 다시 붙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 역시 매한가지라고.
다만, 운 나쁘게 거울이 깨졌을 뿐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