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숭아나무>
"고백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네가 울 때가 좋았다고. 그때는 마음껏 하늘을 봤다고. 원 없이 바다를 봤다고. 난 무조건 너를 따라야만 하는 인생이었으니까, 마음이라도 이기적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고."
샴쌍둥이를 소재로 한 영화 <복숭아나무>
일요일 밤을 마무리할 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나의 몸을 공유한 두 개의 머리, 그리고 두 개의 자아. 과연 이 설정을 어떻게 연출했을까? 라는 궁금증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개연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분위기는, 영화를 틀기 전 줄거리를 보고 예상했던 대로 '슬프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뻔한 슬픔'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류의 슬픔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슬프다기 보단 조금 멍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형, 나는 형 네가 진짜 싫었어. 이렇게 사는 게 다 형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나 그때마다 꼭 살아야만 했다? 그것도 다 형 너 때문에.
동현과 상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인물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아픔을 상대에게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산다.
"아픔"
그래.
우리는 각자의 그 아픔을 마주했을 때, 뒤돌아 도망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산다. 하지만 영화 속 상현에게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동현이 뒤돌아 도망칠 때, 그 아픔을 바라봐야 했던 건 오로지 상현의 몫이었으니까. 절규하는 엄마를 피해 도망치는 동현과 동현의 반대편에서 그런 엄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현. 아무것도 제멋대로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제멋대로 바라볼 수 없는 그에게는, 가장 비겁한 '도망친다'는 자유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
어쩌면 동현과 상현의 얼굴은, 그런 경계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끊임없이 꿈으로허상으로 도망치지만 결국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고자 했지만 결국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현의 모습이, 나는 안쓰러웠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이 시대의 사람들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도망치지 말자. 꿈을 바라보되, 현실을 직시하자. 영화 감독의 의도와는 상당히 다른 결론일지는 몰라도, 나의 결론은 그랬다. 영화는 오늘도 그곳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 현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