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이야기
* 단어 '만남'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이 있었냐고 물으면, 나는 단박에 이 기억을 끄집어낼 것이다.
때는 열여덟의 겨울이었다.
타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불가피하게 이모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모가 다섯, 삼촌이 둘 있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이모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첫째 이모의 집은 지하철역에 내려서 버스로 10분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을버스는 많이 다니지 않았고, 버스 시간을 못 맞추면 한참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 처음 살게 된 내가 그런 걸 알리가 없었다. 마을버스는 시시때때로 다니는 건 줄 알았고,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당장이라도 탈 수 있는 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린 나는 교복을 입고 버스정류장에 서있었다. 버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채로.
유난히 날이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복 위에 패딩을 입고, 그 패딩을 꽁꽁 싸맸는데도 옷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10분, 20분..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도,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 시간표에는 분명 버스가 온다고 적혀 있었지만, 거리에는 버스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쯤 되면 걸어갈 법도 한데, 그때의 나는 바보같이 계속해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버스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마을버스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고.
그렇게 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2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여기 버스 안 와요?"
나는 추위에 떠느라, 내 뒤에 사람이 서있던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남자의 옆에는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커플'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착한' 커플은 바보 같은 고등학생의 말에 속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처음 본 순진한 고등학생의 말을 믿고선 말이다.
그렇게 또 5분이 흘렀다.
"여기 버스 오는 거 맞아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들도 그 추운 겨울에 10여분을 넘게 기다렸으니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그는 꽤나 자상한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데요."
이번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버스도 안 오는데, 같이 걸어갈래요? 날도 추운데."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그 '커플'의 사이에 끼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닌 '신혼부부'였고, 얼마 전 아이를 낳았다고도 했다.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연찮게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모의 집과 그 신혼부부의 집이 바로 옆 단지였던 것이다. 여자가 말했다. "이런 것도 인연이네. 인연" 우스갯소리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또래가 아닌 어른들과 말이다. 본래 처음 본 사람과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집으로 걸어가는 20분 내내,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로 이사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이는 어떻게 기르고 싶은지, 어디를 다녀오던 길인지, 등등.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학교 얘기와 내가 가진 꿈에 대한 이야기,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추운 겨울 속을 걸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안 볼 사이겠지만서도,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끔씩 겨울 거리를 걸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무언가 알 수 없고, 기묘했던 만남. 지금 다시 만난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시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아, 단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꼭 꿈 이뤄서 멋진 사람 돼요. 나중에 만나면 아는 체해주고."
헤어질 때 하는 의례적인 인사라지만,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진솔함이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간 나도 단 20분의 대화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기억에는, 나도 '따뜻한 겨울'이고 싶다.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그런 꿈을 가져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