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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이 Mar 22. 2022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신혼부부

#단어이야기

* 단어 '만남'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이 있었냐고 물으면, 나는 단박에 이 기억을 끄집어낼 것이다.

때는 열여덟의 겨울이었다.


타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불가피하게 이모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모가 다섯, 삼촌이 둘 있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이모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첫째 이모의 집은 지하철역에 내려서 버스로 10분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을버스는 많이 다니지 않았고, 버스 시간을 못 맞추면 한참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 처음 살게 된 내가 그런 걸 알리가 없었다. 마을버스는 시시때때로 다니는 건 줄 알았고,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당장이라도 탈 수 있는 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린 나는 교복을 입고 버스정류장에 서있었다. 버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채로.




유난히 날이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복 위에 패딩을 입고, 그 패딩을 꽁꽁 싸맸는데도 옷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10분, 20분..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도,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 시간표에는 분명 버스가 온다고 적혀 있었지만, 거리에는 버스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쯤 되면 걸어갈 법도 한데, 그때의 나는 바보같이 계속해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버스가 언젠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마을버스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고.


그렇게 버스를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2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여기 버스 안 와요?"


나는 추위에 떠느라, 내 뒤에 사람이 서있던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남자의 옆에는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커플'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착한' 커플은 바보 같은 고등학생의 말에 속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처음 본 순진한 고등학생의 말을 믿고선 말이다.


그렇게 또 5분이 흘렀다.


"여기 버스 오는 거 맞아요?"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들도 그 추운 겨울에 10여분을 넘게 기다렸으니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그는 꽤나 자상한 목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데요."

이번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버스도 안 오는데, 같이 걸어갈래요? 날도 추운데."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커플' 사이에 끼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알고 보니  사람은 '커플' 아닌 '신혼부부'였고, 얼마  아이를 낳았다고도 했다.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연찮게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모의 집과  신혼부부의 바로  단지였던 것이다. 여자가 말했다. "이런 것도 인연이네. 인연" 우스갯소리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맞는  같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또래가 아닌 어른들과 말이다. 본래 처음 본 사람과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집으로 걸어가는 20분 내내,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로 이사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이는 어떻게 기르고 싶은지, 어디를 다녀오던 길인지, 등등.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학교 얘기와 내가 가진 꿈에 대한 이야기,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추운 겨울 속을 걸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안 볼 사이겠지만서도,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끔씩 겨울 거리를 걸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무언가 알 수 없고, 기묘했던 만남. 지금 다시 만난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시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아, 단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꼭 꿈 이뤄서 멋진 사람 돼요. 나중에 만나면 아는 체해주고."


헤어질 때 하는 의례적인 인사라지만,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진솔함이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간 나도 단 20분의 대화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기억에는, 나도 '따뜻한 겨울'이고 싶다.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그런 꿈을 가져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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