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실 청소를 하다가 은행을 발견했다. 은행 구이가 먹고 싶어서 은행을 까기 시작했다. 사실 은행을 까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은행이 눈에 밟혔다.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올라서일까. 은행을 까면 무언가를 깨달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엄마에게 간단한 방법을 전수받은 후, 하나씩 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을 너무 약하게 줘서 여러 번 눌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껍데기가 제멋대로 깨지고 부서져 은행을 빼기 힘들었다. 두 번째는 힘을 너무 많이 줬다. 안에 있던 은행이 으깨져 물이 나왔다. 세 번째는 꽝! 시커먼 표면에 누런 곰팡이가 다닥다닥 핀 걸 보니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네 번의 시도 끝에 은행 까기에 성공했다. 펜치 둥근 부분에 은행 모서리를 끼우고 살짝 힘을 주니, “딱!” 소리와 함께 껍데기가 갈라졌다. 은행이 잘 까질 때는 소리부터 다르다. 명쾌하고 선명한 “딱!”소리가 난다. 썩은 은행은 알맹이가 딱딱해서 그런지 “뚝"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은행은 똑 소리를 내고 어떤 은행은 띡 소리를 내고 어떤 은행은 떽도 아니고 딱도 아닌, 땩 소리를 냈다.
힘을 너무 많이 줘서도, 너무 적게 줘서도 안 되는 은행 까기의 기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렇게 은행 껍데기 까는 법을 익혔다. 어렵게 마주한 알맹이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은행 까는 것도 이리 쉽지 않은데 인생이 순조로울 리가 없지 암암.”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종종 까먹곤 한다. 만족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고 심지어는 썩은 은행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 인생은 계단과도 같다는 것. 그래 다 아는 사실인데, 야속하게도 나는 예쁜 은행보다 썩은 은행이 더 눈에 띈다. 심지어는 어찌나 개성이 강한지, 각기 다른 색과 모양으로 안구에 충격을 준다.
그렇게 썩은 은행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계속 보다 보면 마냥 싫어하기엔 좀 미안해진다. “아니 얘네가 썩고 싶어서 썩었나 뭐.. 멀쩡한 은행이든 썩은 은행이든 다 똑같이 대해줘야지..”라고 또 한번 중얼거렸다.
썩은 은행은 실패다. 나는 실패가 낯설어서 늘 애를 먹었다. 그런데 실패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실패해도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낯섦이 익숙함이 되니 충격이 줄고 행동은 빨라졌다.
어쩌면 두려움이라는 건 낯섦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은행이 나올지 모르고, ‘대개 인생이란 썩은 은행 천지’라고 여길수록 두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은행은 다 깠다. 중간에 썩은 은행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은행 구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소금에 살짝 두른 은행 구이는 무척 맛있었다. 그 맛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