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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피 May 28. 2023

세계 7대 불가사의, 치첸이트사를 걷다

유카탄의 바야돌리드에서

고대 마야 문명의 꽃, 치첸이트사


오늘은 치첸이트사를 다녀오기로 한 날이다. 치첸이트사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마야-톨텍(Maya-Toltec) 문명 유적지로, 바야돌리드에서는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5년 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그때 당시 극심한 무더위에 유적지를 채 다 둘러보지 못했던 쓰린 기억이 있다. 유적지엔 햇빛을 피할 곳이라곤 없기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높이 24미터의 '엘 카스티요' 신전이다. 고대 마야 도시의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거대한 신전은 마야인들이 풍요를 상징하는 뱀의 신 '쿠쿨칸'을 숭배하기 위해지었다고 한다. 수백 년 전 마야인들은 이곳에서 사람의 배를 갈라 심장을 바쳤다. 그래서인지 치첸이트사 유적지 곳곳에서 뱀의 형상이 새겨진 건축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엘 카스티요' @숲피


이외에도 '재규어와 독수리 제단'에서 재규어와 독수리가 사람의 심장을 잡아먹고 있는 모습이 조각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고대 마야인들이 뱀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의 신을 숭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뱀과 독수리, 재규어와 같은 강한 포식자가 고대 마야인들에게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자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재규어와 독수리 제단'의 조각 @숲피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인신공양의 흔적


'엘 카스티요 신전' 외에도 산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 제물로 바쳤던 마야인의 풍습을 치첸이트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두개골의 성이란 이름을 가진 '촘판틀리'는 제물로 바쳐졌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한 해골의 조각들이 제단의 4면 가득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무언가 기괴하면서도 섬찟해서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촘판틀리'의 조각 @숲피


유적지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정도 걸어 들어가니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큰 웅덩이가 나왔다. 이곳 세노테(멕시코 유카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깊은 자연 우물)는 성스러운 샘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던져 넣었던 곳이라고 한다. 


세노테 @숲피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마야인들이 공놀이를 했던 구기장이었다. 마야인들에게 공놀이는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경기에서 이긴 승자는 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했는데, 승자의 죽음은 영예롭게 여겨진 데다가 다음 생에 높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구기장의 골문 @숲피


이와 같은 죽음과 환생에 대한 마야인의 시각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좀 더 의연히 받아들이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흩어져있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사람들을 수월하게 통솔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유용한 도구였거나.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현재의 생을 기꺼이 바쳤던 이들은 그토록 원했던 영원한 안식에 도달했을까. 


넓은 부지를 끝에서 끝까지 훑는 동안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래된 고대 도시를 걷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 위에 세워진 도시인가. 긴 시간이 흘러 남겨진 역사의 잔해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하려 하고 있나. 고대 마야 문명은 환생과 사후세계에 대한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만큼이나 여전히 안개 같은 비밀에 휩싸여 있다. 


해가 지면 마법에 걸리는 마을


유카탄의 여름은 뜨거움 그 자체이다. 뜨겁다 못해 타들어갈 것만 같은 한여름의 뙤약볕은 우리를 자꾸만 실내로 피신시켰다. 유카탄에 온 뒤로 극심한 더위에 내내 시달렸던 탓에 해가 기울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밖에 나갈 용기가 생겼다. 


바야돌리드는 소박하고 단출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한눈에 봐도 끝과 끝이 보이는 아담한 규모의 광장 옆에는 작고 간소한 성당이 서 있다. 한풀 꺾인 더위에 광장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작은 광장을 금세 한 바퀴 둘러보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 마법 같은 일이 펼쳐졌다. 평범했던 풍경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는 검은 새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새들이 하늘 위를 마치 전세라도 낸 듯 휘젓고 있었다. 이리저리 저마다의 규칙이 있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일제히 하늘을 가르기 시작한다. 핑크빛 고요하고 잔잔한 하늘에 검은 파동이 일었다. 


나무에 깨알처럼 수북이 내려앉은 검은 새들 @숲피


태양은 하늘 아래 모든 만물을 그림자로 만들어버리고는 점차 저물어갔다. 어둠에 휩싸인 적막한 성당과 그림자가 되어 손을 흔들고 있는 야자수들. 그리고 그 오묘한 풍경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는 검은 새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무리 지어 활강하던 새들이 이제는 평면의 납작한 종이새가 되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자신들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고개를 쭉 뺀 관객을 향해 축무를 선보인다. 


그림자가 되어버린 세상 @숲피


해가 떨어지자 새들이 더욱 분주해졌다. 낮엔 들을 수 없었던 짹짹거리는 지저귐이 광장을 가득 채운다. 이제 인간들의 시간은 저물고 자신들의 시간이 시작됐다는 듯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더 거세게 지저귀는 소리에 이 마을이 정말 마법에 걸려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면 마법에 걸렸다가 아침이면 자연스레 풀려나는 그런 마법에. 나는 그날 내가 본 광경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야돌리드 @숲피


바야돌리드의 수도원에서 생긴 일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는 수도원은 뜨거운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시간에는 아치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가,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는 수도원의 건물 외벽이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탈바꿈하는 다채로운 공간이다.  


오후에 다시 찾은 수도원 앞 공터는 어느새 동네 아이들과 강아지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곱게 깔린 잔디밭에 거리낌 없이 드러누운 아이들과 그 곁을 나뒹구는 강아지들. 신난 탄성을 내지르며 쉼 없이 뛰어다니는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모습에 옛 기억이 아련한 향수가 되어 떠올랐다. 나는 공터 벤치에 앉아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그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수도원 앞 공터 @숲피


어느새 공터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넓은 공터는 어느새 먹색의 캔버스가 되어 그 위를 오가는 사람의 형체도 쉬이 분간이 가지 않았다. 9시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9시가 조금 지난 무렵, 공연이 시작됐다. 매일 9시 정각에 펼쳐지는 라이트 쇼는 수도원 건물 외벽에 불빛을 쏴서 바야돌리드의 역사를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래픽이 충분히 다채로워서 내용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꽤나 흥미로웠다.


라이트 쇼 @숲피


20분간 이어진 쇼가 끝이 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어디선가 마야인의 복장을 한 횃불을 든 남자들이 환호하며 나타나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자리에 멀뚱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에게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우리도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7명의 마야 전사들은 횃불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췄다. 그들은 전사들의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해 뜨거운 불을 거침없이 손발로 만지고,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으며, 불꽃을 입 안에 넣고 삼키기도 했다. 고대 마야인들은 춤을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의 소통 도구로써 사용했는데, 그중에서도 불의 춤은 마야인들에게는 일종의 정화 의식이었다고 한다. 마야 전사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주위를 둘러싼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불의 춤 @숲피


짧지만 강렬했던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뒤돌아본 곳엔 커다란 손톱달이 나뭇가지에 노랗게 걸려 있었다. 저 먼 우주에서 인간 세계에 잠시 내려온 것처럼 낮게, 그리고 아주 가까이... 거리를 오고 가는 오토바이조차 마치 다른 세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바야돌리드는 내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크고 작은 선물을 받은 곳으로 영영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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