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탄의 이사말에서
멕시코 유카탄 주의 수도이자 멕시코 남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 메리다에 도착했다. 메리다는 멕시코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우리는 메리다를 유카탄 주의 다른 작은 도시들을 방문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내게는 멕시코에서 가장 뜨거웠던 곳으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거리를 나서기만 해도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던 곳. 샌들을 신은 발등이 아프도록 따가워서 도저히 길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던 곳.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갖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더운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을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메리다는 여전했다. 예전만큼의 더위는 아니었지만 10월임에도 여전히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메리다는 일 년 중 4월~8월이 가장 더운데, 지난번엔 6월에 방문했었다.)
땡볕 아래 한참을 걸어 숙소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오빠는 이사말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알아볼 겸 터미널에 다녀왔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이미 해는 떨어지고 있었고 먹을거리를 살 겸 근처 마트에 잠깐 다녀오자며 막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적절한 온도와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한낮의 열기는 가시고 저녁 바람과 함께 미지근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숙소 바로 옆 큰 대로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모티브로 만든 거리로, 넓은 6차선의 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뻗어있었다.
대로변은 가운데를 두고 한쪽은 차가, 한쪽은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양쪽에서 끊임없이 오고 갔다. (매달 첫째 주 토요일, 직선으로 5km가 이어지는 몬테호 거리는 찻길을 막고 자전거 도로로 운영된다.) 토요일 저녁의 길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제각기 다른 속도로 길을 걷는 사람들 덕분에 발걸음이 자연스레 늦춰졌다.
늦저녁 보랏빛으로 물든 거리에는 플리 마켓이 열렸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 소리가 흥을 돋웠다. 야자수들은 지는 해를 뒤로하고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유럽풍 건물들은 짙어져 가는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마르케시따(크레페를 닮은 유카탄 지역의 디저트)를 파는 가판대들과 알알이 조명을 밝힌 예쁜 가게들, 늦은 시각에도 마차를 달리는 마부들과 테라스석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까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소리와 아직 밤이 한창이라는 듯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의 소리가 한 데 어우러져 평화로운 여름밤을 활기차게 연주하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따뜻한 조명들과 붐비는 길거리에 마음이 점점 들떴다.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분 좋은 음악 소리 때문일까. 마주 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걸린 미소 때문일까.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 아주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정한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거닐거나 차양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밤거리를 내달렸으며, 거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였다. 벤치에 앉은 여자의 손에 들린 투박한 꽃다발과 곁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손에 들린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그렇게 낭만적일 수 없었다.
그날 메리다의 그 거리엔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거리는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도 있었고 아이들과 함께 마실 나온 가족들도, 삼삼오오 무리 지어 지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메리다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어디나 똑같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양은 한국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멕시코는 특히나 한국에선 위험한 나라로 악명이 높다. 카르텔과 총기를 든 강도, 마약 등 부정적인 것들이 이 나라의 가장 주된 이미지이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보도하는 것들이 그 나라를 인식하는 주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이미지가 주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곳 멕시코도 다른 여느 나라들처럼 성실한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며,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다정한 미소로 맞이해 주는 곳이다.
내가 오늘 본 그 시간의 메리다는 행복과 낭만으로 점철되어 빛나고 있었다. 지구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멕시코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양이 뜨고 진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어느 평범한 토요일 저녁이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건 어쩌다 한 번 볼 법한 특별함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곁에 있던 것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맞닥뜨린 그 순간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사말은 메리다에서 동쪽으로 72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사말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마을 대부분의 건물이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메리다에서 출발한 버스는 한 시간여를 달려 사방이 노란 마을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버스 터미널을 나서자마자 샛노란 벽의 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꼭 예쁜 동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제일 먼저 이사말의 심장이자 상징인 산 안토니오(Convento de San Antonio de Padua) 수도원에 들렀다. 계단을 올라 입구부터 샛노란 아치를 통과하니 정면에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이사말이구나. 사진으로만 보던 노오란 건물이 눈앞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안뜰을 가운데 두고 동그란 아치가 이어졌다.
이사말의 수도원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트리움(고대 로마 주택 건축의 중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가 구름 뒤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가 내밀기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노랗게 빛나는 한적한 수도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치를 따라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사말은 고대 마야 도시 위에 세워진 마을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의 특징을 지닌 건물들과 말이 끄는 마차가 활보하는 거리, 스페인어와 마야어 두 언어로 적혀있는 표지판이 어우러져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옛 시대극 속에 들어온 것처럼 향수를 자극한다. 천천히 걷고 싶은 거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우리는 쉼 없이 걸었다. 작은 마을이라 금방 돌아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아기자기하면서도 독특한 풍경은 걸음마다 멈춰 서게 했다. 노랗게 칠해진 건물들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상큼한 레몬색, 뽀얀 바나나우유 색, 개나리를 닮은 샛노란색, 빛바랜 노란색…. 같은 노란색일지라도 톤이 조금씩 달랐다.
중앙 광장에서 북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피라미드 키니치 칵모(Kinich Kakmo)가 있는데, 이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피라미드이다. 입구를 향해 난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금세 마야 문명이 남긴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멀리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서 이런 고대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니 노란 수도원과 함께 탁 트인 마을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사말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걸은 걸음 수가 만 보를 넘겼을 때, 이사말에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하루는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센트로를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골목을 돌자 학교가 막 끝났는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학교 앞 거리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꼬마 아이들이 마중 나온 부모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못내 정다웠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막 나오는 아주머니의 두 손 가득 들린 큼지막한 야채 봉투가 저녁시간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고요한 골목길에는 집집마다 내걸어 놓은 예쁜 화분들이 예쁘게 걸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던 티브이 소리와 비눗방울처럼 터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널린 색색의 빨래 옆에 날아와 곱게 걸렸다. 사람 사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장면이 가슴에 콕 박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노을이 슬며시 내려앉기 시작한 황금빛의 골목들. 거리를 돌 때마다 짙은 주홍빛이 눈부시게 흩뿌려졌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어느새 촛불이 꺼지듯 노을빛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사말에서의 마지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