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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n 18. 2023

조용함을 잃어가는 멕시코의 조용한 어촌 마을


조그만 어촌 마을, 시살


유카탄 반도의 중심 도시 메리다에서 한 시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더위를 식혀줄 바다가 나온다. 꽤나 가까운 거리기 때문에, 유카탄 사람들은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해변에서 휴식을 취한다. 다양한 해변 마을이 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대표적인 곳은 프로그레소 (Progreso)다. 워낙 오래전부터 휴양지로 거듭난 프로그레소는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과 여행 프로그램이 잘 짜여 있는 편이다. 심지어 바하마 돼지 섬처럼 돼지들과 수영을 할 수 있는 이색적인 돼지 해변 (Pig Beach)도 있다.


한적한 시살의 마을 풍경 (사진 출처: @숲피)


프로그레소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시살 (Sisal)이라 불리는 조그만 해변 마을이 있다. 2020년 12월부터 멕시코 마법의 마을로 공식 지정된 이곳은 북적이는 프로그레소와는 달리 정말 작고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당장 인구 수만 봐도 약 2천 명 수준으로, 5만 명에 가까운 프로그레소와 큰 차이가 난다. 만약 사람이 많지 않은 해변가에서 여유로운 기분을 내고 싶다면, 혹은 잔잔한 파도를 보며 물멍을 하고 싶다면 시살은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시살의 첫인상과 해변


사실 시살의 첫 모습은 그다지 인상 깊지 못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간 마을 다운타운은 두 세 블록 정도에 불과했고, 시살이 마법의 마을임을 인증하는 큰 글씨와 야자수가 펼쳐져 있었을 뿐이었다. 양쪽에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있었지만 워낙 관광객들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35도가 넘는 더운 날씨 탓인지 조용하기만 했다.


시살 센트로 (사진 출처: @숲피)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이 마을이 어떻게 마법의 마을이 됐는지 의심이 들정도였다. 항상 관광지 느낌의 마법의 마을만 다닌 탓인지, 자연스레 시살에서도 그런 느낌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소박한 마을 분위기 그 자체가 시살의 매력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살 해변가 (사진 출처: @숲피)


시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다를 마주했을 때 느껴졌다. 조그만 중심지를 지나면 볼 수 있는 파란색 하늘과 바다는 그 자체로 마음의 안정감을 줬다. 바다 한가운데로 길게 펼쳐진 부두 끝자락에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관광객들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별한 것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 해변에서의 시간은 “여행에서 특별한 것이 없어도 되니 그냥 여유로운 이 순간을 즐겨”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시살의 바다는 물이 차지 않고 파도가 잔잔해 마치 천연 수영장에 온 느낌을 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시살 바다의 수심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해변들은 얼마 안 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지지만, 시살 해변은 수 십 미터를 한참을 걸어도 발이 땅에 닿을 정도로 물이 얕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시살 주변에는 바다 한가운데 갑자기 조그만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 맹그로브


시살에는 바다 말고도 맹그로브가 형성되어 있다. 열대 지역 해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맹그로브는 바닷가 근처와 같이 염분이 높은 곳에서 서식하는 나무나 숲을 뜻한다. 뿌리는 물에 잠겨있고 나뭇잎만 수면 위에 올라와 있는 곳이 맹그로브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맹그로브라는 단어는 과라니어 ‘Manggi’에서 유래된 만큼 중남미 지역과 관련이 있으며, 쿠바, 멕시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다양한 국가에서 발견된다. 참고로 멕시코는 전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맹그로브가 있으며, 마법의 마을 중에서 맹그로브를 볼 수 있는 곳은 시살이 유일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새들 (사진 출처: @숲피)


맹그로브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살 맹그로브의 경우엔 가마우지, 왜가리, 펠리컨, 검은 머리물때새 등 여러 종류의 조류들을 비롯해 운이 좋다면 플라멩코도 볼 수 있다. 조그만 조각배를 타고 습지로 나아가다 보면 중간중간 물 위로 나와있는 나뭇가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새들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맹그로브의 물은 어두운 붉은색을 띠는 특징이 있는데, 맹그로브 숲 주변의 토양이 높은 철분을 함유해 이것이 물에 녹아 빨간색을 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맹그로브 풍경 (사진 출처: @숲피)


비좁게 만들어진 물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맹그로브 숲 투어가 시작된다. 워낙 조그만 길이 많고 방향을 잡기 힘들어 가이드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물을 젓는 소리를 제외하면 숲은 적막함으로 가득해 무섭기도 하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면 수영을 할 수 있는 세노테가 나오는데, 맹그로브에서 갑자기 물고기들이 보일만큼의 투명한 물이 나오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해적의 역사를 간직한 곳


바다와 맹그로브를 지나 마을 거리를 걷다 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바로 시살의 긴 역사를 간직한 산티아고 요새와 등대다. 이 요새는 스페인 제국이 시살 항구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근처에 자주 출몰하던 해적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가장 먼저 신대륙에 식민지를 선점하고 금은보화를 가져와 많은 경제적 수익을 얻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똑같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충분치 않았다. 대신 해적들이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무단으로 귀한 물건들을 탈취했고, 무역이 활발했던 시살 항구를 표적으로 삼기까지 했다. 요새 앞에 있는 공원에 대포가 놓여 있는 것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센트로에섭 보이는 요새 위 등대 (사진 출처: @숲피)


지금은 조그마한 어촌 마을로 남은 시살의 모습을 봤을 때, 16세기초 무역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조금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이곳은 쿠바 아바나에서 귀한 물건을 가지고 도착하는 배들이 많았으며, 에네켄 수출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행정적으로 중심지였던 메리다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역이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살의 항구는 그 기능을 잃었다. 스페인은 시살과 메리다를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습지가 많아 교역을 확장하기 쉽지 않다고 판단했고,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시살은 해적의 공격을 막기 어려운 곳이었다. 대신 이들은 시살 대신 조금 더 나은 조건에 있는 캄페체를 선택해 그곳을 주요 항구도시로 삼았다. 현재 캄페체에는 약 30만 명이 살고 있으며 큰 규모의 요새를 비롯해 해적 박물관까지 있는데, 시살 대신 이곳 규모가 훨씬 큰 건 지리적으로 더 나은 요건을 찾았던 스페인의 결정이 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No turistificación! 마법의 마을을 원치 않은 마을 주민들


그렇게 시살은 조용한 마을로 남겨졌다. 경제적 영광이 사라지니 남은 건 한적함 뿐이었다. 마을엔 천여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주로 어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사람들은 시살을 알려지지 않은 천국 (Paraiso Desconocido)이라 불렀고, 잠시 들려 휴식을 취하는 곳이 됐다. 


시살 바다에서 패들보드를 즐기는 모습 (사진 출처: @숲피)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시살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됐다. 2018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멕시코의 암로 대통령은 유카탄 반도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킬 ‘마야 기차 (Tren Maya)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멕시코 남부에 있는 치아파스에서 시작해 유카탄 반도의 유명한 도시들을 철도로 연결하는 이 메가 프로젝트는 유카탄 반도에서 개발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땅을 미리 사둔 후 이득을 보려는 투기꾼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칸쿤, 툴룸, 바칼라르에는 수많은 관광 관련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시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카탄 주 측에서는 자연이 아름답고 역사가 오래된 시살을 마법의 마을로 만들어 더욱 관광지로 만들고자 했다. 철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더 많은 곳들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시살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이 마법의 마을이 되는 결정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시살의 잔잔한 바다 (사진 출처: @숲피)


보통의 멕시코 마을 주민들은 마법의 마을이 되길 희망한다. 매 3년마다 정하는 심사에서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부의 투자를 받고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경제적 수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살 마을 주민들은 여기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어촌 마을에서 살길 바랬다. 만약 경제적인 수익을 얻는다 해도, 그건 모두 투기꾼을 비롯한 외부인에게 넘어갈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다. 애초에 환영의 뜻을 내비칠 줄 알았던 유카탄주 측과는 달리 완전히 반대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결국 주정부와 마을 주민들 간의 타협을 찾은 것이 지속가능한 여행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약속에도 밀려오는 자본과 개발을 막지 못했다. 과거 어부들이 자유롭게 다니던 해변은 이제 사유화가 되어 길이 막혔고, 주변 생태계는 파괴되어 생물 개체수가 줄었다. 결국 2021년 7월 마을 주민들은 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팻말에 "시살은 해변의 사유화를 거부한다”라고 쓰며 자신들의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조금씩 관광객이 늘어나는 시살 (사진 출처: @숲피)


시살에 머무르는 동안 'Se Vende', 즉 땅을 판다라는 표지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시살 해변 주변엔 점점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더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마법의 마을로 선정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살의 매력을 느끼는 건 좋지만, 중요한 건 주민들이 원하는 마을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시살은 이제 알려진 천국 (Paraiso Conocido)이 됐다. 앞으로 천국이 계속 천국으로 남기 위해선, 지속적인 공존이 가능하도록 해결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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