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까의 마순테에서
마순테는 멕시코 와하까 주의 남쪽 끝, 드넓은 태평양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멕시코에 널리고 널린 게 바닷가 마을인데, 무어가 그리 특별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나 또한 궁금했으니까. 바다가 특별히 더 예쁠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그리 잡아끌까?
이 작은 마을에서 꽉 채운 일주일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마순테의 특별한 점은 끝도 없이 꼽을 수 있게 됐다. 누군가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마순테는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마순테는 히피스럽다. 사람들은 젖은 수영복을 입고 물을 뚝뚝 흘리며 맨발로 길거리를 걸어 다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바다에 뛰어든다. 독특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남녀 상관없이 긴 머리와 힙한 드레드록, 형형색색의 브릿지와 현란한 피어싱, 개성 넘치는 타투들로 제각기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풍긴다. (기분 탓일까. 그들은 걷는 '뽐새'도 남다른 것 같다.)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나 또한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맛본다. 문득 분위기가 주는 힘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이곳만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나도 평소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는 것을 느꼈으니까.
마순테가 특별한 이유는 뜨거운 태양 아래 빛나는 푸른 바다 때문도, 장엄한 일몰이나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때문도 아니다. 마순테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 덕분에 대체재가 없는 유일무이한 곳이 된다. 이게 바로 마순테가, 마순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리는 마법이자 마순테가 가진 마법 같은 힘이다.
장기 여행자들 사이에서 아주 많이 통용되는 '블랙홀'이란 표현이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얼른 떠나고 싶어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값싼 물가와 편리한 인프라, 고유한 분위기, 다양한 액티비티 등이 알맞게 버무려져 쉽사리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 끄는 장소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바로 마순테가 여행자들 사이에선 그런 '블랙홀' 같은 곳이다. 그만큼 마순테는 그저 스쳐 지나가기엔 아쉬운, 매력적인 곳이다. 마순테의 거리를 조금만 걸어보면 금세 알게 된다.
그래선지 마순테는 유독 외국인이 일하고 있는 카페나 샵을 많이 볼 수 있다. 해변에 어울리는 밝고 통통 튀는 색감의 옷이나 이국적인 장신구를 파는 샵에 들어가면 외국인이 맞아주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어떤 이들은 여행 중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직접 만든 수제 액세서리와 소품을 팔기도 한다.
그뿐인가? 마순테의 절벽에서 내려다본 해변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렇게 여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한 번 맛보고 나면 더운 날씨와 습기로 금세 등을 타고 줄줄 흐르는 땀도, 흔한 대형 마트나 쇼핑몰 하나 없는 불편함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이곳에 머물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감수할 만한 것들이 되는 것이다.
마순테는 자유롭다. 한낮의 마순테의 해변은 자유 그 자체다. (마순테의 중심부에서 약 6km 떨어져 있는 'Playa Zipolite'는 멕시코의 유일한 누드 비치다.) 작열하는 오렌지 빛 태양 아래 사람들은 옷을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서지는 파도에 뛰어든다. 가슴을 내놓은 채로 물놀이를 즐기고, 나체로 아무 거리낌 없이 해변을 걷고, 뜨거운 햇볕에 몸을 굽고, 만들어진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스러움도 잠시, 처음엔 생소하고 낯설기만 했던 사람들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자연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그 어떤 것보다 '자연스러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이 꼭 한 마리의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자유롭고, 그래서 더 뜨거운 청춘의 한 장면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었다. 그 장소에서만큼은 모두가 뜨거운 청춘이었다.
마순테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장소를 한 곳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곳을 꼽을 것이다. ‘신성한 언덕(Cerro Sagrado)’이라고도 불리는 '푼타 코메타(Punta Cometa)'는 지형상 멕시코의 남쪽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돌출된 지점으로, 여기서의 일몰은 놓치면 안 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노래로 치자면 클라이막스, 영화로 치자면 명장면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푼타 코메타는 멕시코에서 의식의 중심지이자 마법과 치유의 장소로 간주된다. 전설에 따르면 푼타 코메타의 어딘가에 아즈텍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이 장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그만큼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에 어울리는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일몰을 보기 위해 시간 맞춰 절벽을 올랐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20~30명가량의 사람이 한 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다가가 살펴보니 누군가의 결혼식이었다. 신랑과 신부는 바닥에 앉아 있었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하나가 되어 소박하고 신성한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작년에 있었던 나의 결혼식과는 매우 상반된 분위기였다. 신랑과 신부는 모래 바닥 위에 펼친 깔개에 앉아 손을 꼭 잡고 그들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낮게 나는 새들의 지저귐, 귓가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 자연의 소리가 배경 음악이었고, 그곳에 그 시각 존재했던 모두가 하객이었다. 그들은 양손을 꼭 붙든 채 마주 서서 세상 만물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약했다. 모두가 혼인 서약의 증인이 되었고, 곧 그들은 자연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살면서 본 결혼식 중 최고로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절벽의 가장자리에 서면 마치 세상의 끝에 서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패들보드를 탄 사람들이 웃통을 벗은 채 온몸으로 태양 빛을 발산하며 저물어 가는 해를 향해 노를 젓는 시간.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절벽에 앉았다.
선명하게 그어진 태양의 아랫부분이 지평선에 닿고 그 너머로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홀했다. 생애 첫 일몰을 보는 것 같은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태초의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태양 빛을 고스란히 담은 사람들의 두 눈은 태양만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약한 태양빛을 전등 삼아 절벽을 따라 난 길을 걸어가는 동안 머리 위에는 별들로 이루어진 보랏빛 망토가 펼쳐졌다. 핸드폰 후레쉬로 발 앞을 비추며 어두운 숲길을 벗어나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비추는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를 감싼 공기가 일순 변했다. 이 세상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분주하게 불을 밝힌 가게들은 낮의 그것과는 다른 존재감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잠깐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곳으로 한 발짝 발을 들인 그 순간, 다시 현실 세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