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레로의 탁스코에서
탁스코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새벽 내내 비가 우렁차게 쏟아지더니, 어느새 날이 맑게 개었다. 얼핏 오전 7시경 테라스에 있던 오빠가 나를 깨워 일출을 본 게 기억이 난다. 누운 자리에서 커튼을 걷으면 정면으로 보이던 여명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말간 하늘엔 청량한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언가 기분 좋은 예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탁스코는 멕시코 게레로 주의 마법의 도시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과 아름다운 콜로니얼 풍의 거리, 자갈길로 뒤덮인 미로 같은 골목이 매력적인 곳이다. 탁스코의 전경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면 굽이치는 골목골목을 여유로이 거니는 상상을 절로 하게 된다.
도시의 첫인상을 말로 표현하자면? 그저 “미쳤다!”는 다소 거친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얀 건물들과 붉은 지붕, 그리고 집집마다 창문 밖으로 내걸어 놓은 색색의 화분들과 옛 거리를 지나다니는 딱정벌레차들…. 언덕 위에 자리한 도시답게 한눈에 들어오는 시내의 전경과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른 도시들과 구분 지어주는 탁스코만의 그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는 조약돌 거리에는 노점들이 알차게도 들어서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알록달록한 모빌이며, 직접 손으로 그린 장식품들이 눈길을 잡아 끈다. 비탈길을 따라 양 옆으로 줄지어선 수공예품 노점들이 흐드러진 꽃과 어우러져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만 같다.
탁스코의 중심이자 가장 상징적인 장소인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경이 시시각각 변했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아무리 걸어도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래서일까. 마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었다.
마지막 오르막이다. 좁은 길은 S자로 꺾여있어 시야가 막혀 있다. 꿋꿋이 비탈진 경사를 오른다. 그리고 마지막 커브에 접어드는 순간, 진심 어린 탄성이 목 끝에서부터 흘러나온다. 두 핑크빛 첨탑이 푸른 나무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이 이야기의 절정이자 결말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탁스코는 멕시코 은의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 스페인 식민 시절, 은광이 발견되면서 광산 붐이 일었고, 지금까지도 탁스코의 사람들은 은으로 장신구나 장식품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은'은 탁스코의 정체성이자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은 세공이 오랫동안 명맥을 이으며 내려온 전통 산업이기 때문에 은 주얼리가 지역 특산품인 셈이다. 그래서 은으로 만든 반지, 팔찌, 귀걸이, 목걸이, 핀 등 다양한 종류의 액세서리를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보석상, 노점상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또, 특별한 체험을 원한다면 보석 세공 워크숍에 참여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액세서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오래된 은광을 방문해 볼 수도 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상점들을 둘러보며 서성이는데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가볼 만한 곳들을 세세히 알려주면서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며 한 마켓으로 우릴 이끌었다. 마켓 전체가 은으로 만든 액세서리며 장식품들을 파는 노점상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가판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장신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면 본인의 사이즈로 새로 만들어주는 데 고작 5분밖에 안 걸린다고 했다. 심지어 원하는 디자인이 따로 있다면 커스텀 제작도 해 준다고! 이럴 수가.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사진을 보여 주었고, 제작 비용으로 2만 원 정도가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상점 옆에 딸린 제작 공간(taller)에서 은을 세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제작 공간이 따로 없는 다른 상점들은 보통 집에서 만든다고 했다. 진정한 가내수공업인 셈이다.
어느새 내려앉은 선명한 핑크 빛 황혼은 마치 하늘이 선사해 주는 너그러운 선물 같았다. 하늘은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곧이어 검게 물든 어둠이 도시에 짙게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 둘 밝혀지는 불빛... 밤의 시작이자 새로운 도시의 탄생이었다. 거대한 먹색 구름과 장엄한 성당, 고요한 번개와 소리 없는 어둠. 하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훤히 밝혀지는 도시의 전경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시 자체가 해가 떨어진 저녁 어느 시점이 되면 손가락을 튕기듯 짠 하고 마법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어느 낭만적인 마법사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광장을 빙빙 돌던 딱정벌레 차들과 풍선을 팔던 상인들, 거리에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 두 눈으로 어둠을 밝히는 딱정벌레차는 여전히 앙증맞고, 영화 같은 밤을 만드는 데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밤이 되면 탁스코의 거리는 그 자체로 명소가 된다. 멕시코 관광 사이트에 나와있던 것처럼, 탁스코는 마법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빛의 도시(Ciudad Luz)라고 불린다 다더니 그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반짝이는 빛의 도시, 탁스코. 낮이건 밤이건 빛나는 곳이구나, 여기는. 도시 전체가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