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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사람 Mar 06. 2020

작품은 관람자에 의해 완성된다.

관람자가 선택한 맥락의 중요성


이 사진은 지인이 페이스북에 게시한 포스팅이다. 페이스북 뉴스 피드를 스크롤하던 중 발견했다. "The Chair"라는 제목을 가진 현대미술 작품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가는 벽걸이 TV를 설치하다 실패한 형상을 표현했다. 벽걸이 프레임이 벽에서 뜯어져 TV는 바닥에 떨어졌고 그렇게 설치에 실패한 프레임과 TV의 모습이 묘하게 의자의 모습 같아졌다. 작가는 그 모습을 의자로 치환하여 작품을 탄생시켰다. 나는 이것이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기술 우월주의를 풍자하고 비판한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걸이 TV는 전자, 전기, 컴퓨터, 디스플레이, 대량생산, 기계공학의 종합체로 인류의 최첨단 기술을 상징한다. 반면 의자는 고대부터 존재하던 기술이라고 불리기조차 힘든 원시적인 도구다. 하지만 이 순간 TV는 고작 발 받침대에 불과하고 TV를 벽에 걸 수 있게 해 주었던 공학기술인 프레임은 순전히 의자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단순한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산업혁명 이후에 발명된 그 어떠한 기술도 필요 없다. The Chair는 불필요한 기술로 치장된 최첨단 의자인 것이다. 심지어 자세히 보면 의자의 표면에는 못이 튀어나와있어서 사람이 앉을 수도 없다. 실용성 조차 없는 의자다. 마치 불필요한 신기술로 가득 찬(Overspec) 최신 IT 기기들처럼 말이다. 인간은 지면에 놓여도 충분히 잘 감상할 수 있는 TV를 굳이 더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여 벽에 부착시킨다. 그것조차 온전하게 성공시키지 못한다. 이것 자체로 인간의 불완전함 표현하였고, 인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불필요한 기술도 끊임없이 만들고 이윤을 내기 위해 부실한 제품이라도 팔아야 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미성숙성, 허구성을 비꼬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을 가지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인류 기술 문명 자체를 비판하다니? 정말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스크롤을 더 내렸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이 사진은 작품을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원룸 만들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설치 실패"라고 게시한 포스팅이었는데, 누군가가 벽에 TV를 설치하다가 진짜로 실패한 사진, 그냥 웃긴 이었다! 단지 "The Chair"라는 캡션이 달려서 재공유되었을 뿐이다. 기술문명을 풍자한다던지 등의 의미 따위는 존재할 여지가 없었고, 그 누구도 그런 의도를 갖고 사진을 찍거나 게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관람자인 내가 선택한 담론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반전이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고, 고무되었다. "현대미술 The Chair"라는 캡션과 함께 존재하는 이 일상적 대상이 어째서 내게는 대단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 되어버린 건가?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작품 내부와 외부의 관계와 권력과 갈등의 구도는 어떻게 변화 했을까? 현대미술의 역사는 과거를 파괴해온 역사와 같다. 실제 세계를 재현한다는 전통 미술과 제도를 파괴함으로써 (서양의) 현대의 미술사는 시작되었다. 재현을 중시하는 고전 미술과 아카데미즘을 거부하여 순수한 조형원리로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모더니즘이 탄생하였고, 아얘 순수 미술이 갖는 자체를 부정하고 반예술을 시도하는 아방가르드가 등장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와서는 그동안 확장되어온 미술의 범주 자체를 파괴하고 해체했다. 책 현대미술 강의는 "기호"를 차용하여 그 역사를 신선하게 설명한다. 모더니즘에 와서 미술은 "기호"로 전환되었다. 그 기호는 재현과는 동떨어진 순수 미술을 의미한다. 아방가르드는 이 "기호"자체를 공격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침내 이 "기호"를 해체했다(<현대미술 강의>에서 정리). 특히 아방가르드의 시도는 재미있다. 미술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예술이라는 제도화, 제도로서 편입되는 것을 부정했다. 미술 자체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방가르드의 시도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미술의 가능성을 연 새로운 미술의 범주를 만들어냈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봐도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과거의 것을 해체하고 재정의했다. 과거의 권력이 파괴되었다. 고전주의를 신봉하는 아카데미 권력이 종말을 맞고 모더니즘이 등장했지만 어느 순간 모더니즘조차 과거의 권력이 되어있었다. 과거에는 미술가는 작품을 결정하고 제작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 와서는 그 고정관념마저도 해체되었다. 작가는 결정만 하고 제작은 타인에게 맡긴다. 과거의 작품은 세상과 단절된 작품 내의 세계만 담는다. 하지만 현대의 작품은 작품 내부를 벗어나 외부세계의 관계를 설정한다. 따라서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 주체가 작가가 아닌 관람자가 된다. 작품을 마지막에 완성시키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관람자가 되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이것을 관람자의 몫(beholder's share)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미니멀리즘에서는 작가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다. 그렇게 작품은 "작가" 및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관람자"의 시간적 공간적 신체적 맥락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이렇듯 과거의 미술부터 동시대의 미술 까지 관람자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졌음을 알 수있다. 


다시 페이스북 게시글 "+ 현대미술 The Chair"로 돌아가 보자. 이 "대상"은 현대미술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적어도 작품의 경험적 측면에서 내 결론은 "그렇다"이다. The Chair는 작가가 없었다. 애초에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가가 희미해지고 관람자의 몫이 중요해지는 것이 현대 미술의 특징라면, 더 나아가서 관람자가 작가조차도 새롭게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새롭게 규정된 작가는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맥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그동안 체험해온 경험과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떤 대상(The Chair)에게 의미를 부여했으며, 어떠한 인지심리적 반응과 감정을 경험했다. 공간은 대상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은 어떠한 공간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그 맥락이 달라지고 그것을 감상하는 관람자 또한 영향을 받는다. 사진에 있었던 캡션 "+ 현대 미술 The Chair"는 대상을 새로운 공간적 맥락 속에 놓이게 했다. 그렇게 관람자로부터 작품으로 의미를 부여받을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마치 흐트러진 침대가 방구석이 아닌 흰 벽의 화이트 큐브 공간에 놓여, 작품으로써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작품인가? 동시대에 세계에는 모든 대상이 맥락에 의해서 작품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작가가 아닌 누군가가 어떠한 의도 없이 만든 무엇에도 말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작품은 작가가 아니라 관람자가 선택한 맥락이 완성한다. 이것에 현대미술의 무한한 잠재성이 존재한다. 그런 현대의 미술이 살아서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현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재미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의견도 궁금하다. 위에서 소개한 "The Chair"는 작품이 될 수 있을까?




References:

사진 출처: 류시형 님 페이스북 (fb.com/ryushik)

현대미술 강의, 조주연, 글항아리

통찰의 시대, 에릭 캔델,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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