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뒤샹전을 관람했었다. 사전에 뒤샹에 대해 공부를 조금 하고 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인상깊은 전시였다. 초기작 부터 순차적으로 배치된 작품들을 따라가며 어떤 맥락속에서 그러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 왜 그것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인지 등을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샹의 작품 뿐만아니라 그의 연구 스케치나 메모등도 같이 전시해 놓음으로써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작품들이 어떤 개인적 배경에서 탄생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철저한 기획을 거쳐 선별한 작품이 큐레이팅 된 전시와 맥락없이 작품들이 놓여있는 전시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공간속에서 존재한다. 가령 흰벽으로 둘러쌓인 전시공간 속에서 관람자는 눈앞에 놓인 대상 즉 작품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흐트러지고 지저분한 침대가 방안에 있었다면 그저 일상적 대상인 침대일 뿐이다. 그 대상이 갖는 애매성(ambiguity), 즉 관람자가 느끼고 해석할 여지 "관람자의 몫"은 존재할수 없다. 하지만 그 너저분한 침대가 화이트 큐브라고 불리는 흰색의 전시공간 안에 위치해있다면? 어떠한 형태의 대상이라도 그 공간속에 놓여있는 자체로 관람자에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즉 평범한 물건도 미술관이라는 공간속에 놓이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것. 이것이 공간의 힘이다.
현대의 작품들은 과거 미술을 정의하던 범주를 파괴하고 그 영역을 더 넓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작품들의 형태는 때로는 대단히 복합적이며 2차원 액자를 넘어선다. 따라서 그러한 작품이 놓인 공간이 어떠한지, 그 공간의 연출과 구성 그리고 다른 작품들간의 관계와 배치가 대단히 중요해 지는 것이다. 큐레이터가 바로 그런 공간을 연출하고 기획하는데 구심점 역할을 한다. 책 <미술관에 대한 모든 것>을 통해 잘 몰랐던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큐레이터는 일종의 프로젝트 리더다. 전시 아이디어를 설계하고 기획 및 총 감독한다. 홍보, 제작, 전시 공간 설계, 전시 디자인 등을 포함한 모든 전시 기획 과정이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훌륭한 공간 연출과 큐레이팅이 더 좋은 전시를 만든다는것은 신경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에릭 캔델의 저서 <통찰의 시대>에 따르면, 작품을 볼때 우리의 뇌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과 인지 반응을 체험하게된다고 한다. 따라서 작품을 2차원 스크린속에서 보는것과 3차원 공간속에서 작품을 보는것은 서로 다른 인지경험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2차원 사진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작품을 3차원 공간속에서 직접 경험했을 때 더 풍성하게 지각할 수 있는 배경이다. 우리가 교과서가 아닌 직접 미술관에가서 작품을 보아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잘 기획되고 연출된 공간속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관람자의 인지, 감정 체계를 더욱 극대화 시켜 반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작품을 통해 얻는 관람자의 몫을 극대화 시키도록 기획하여 작품을 재배치하고 공간을 연출한다.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미술관에 대한 모든 것>은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의 역사와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전시가 기획되는 일련의 과정을 군더더기없이 핵심만 담겨있다. 나는 미술관에는 가본적만있지 실제 전시가 시작되기 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는지, 그리고 미술관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런 부분들을 이 책을통해 새롭게 배울 수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특히 이 책을 읽은 뒤 미술관이 어떠한 공간 으로써 새롭게 느껴지게 되었다. 앞으로 전시를 관람할때는 작가의 작품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이라는 또 하나의 작품이 어떻게 구성 및 기획 되어있는지도 주의 깊게 감상해야 겠다. 그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것 같다. 미술관이라는 전시 공간을 어떻게 기획하느냐에 따라서 대상이 새롭게 부여받는 의미와,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지 경험의 폭과 깊이 또한 큰 차이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