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를 보면 콘텐츠에 따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극과 극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기술, 또 하나는 시와 수채화 그림. 책상도 비슷해서 디지털 기기들과 아날로그 도구들이 상존하고 있다.
사실 GPU 빵빵한 메인 컴퓨터는 다른 방에 있는데, 팬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원격 데스크톱 걸고 노트북으로 접근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거실에 수채화 그리다 원격으로 접속해 Stable Diffusion 돌려 그림 생성하면 허탈감 마저 느껴진다.
어릴 때 그림(정확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서 미래에 일러스트레이터나 만화 작가가 되어야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전공들이 돌고 돌아 컴퓨터공학까지 오게 되었다. 근데 이놈의 컴퓨터가 웬만한 일러스트레이터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그것도 프롬프트만 대충 쓰면 몇 초만에!
CIVICAI 사이트에 가면 그림 모델이 즐비한데 2~6기가 정도만 다운로드하면 방구석에서 내가 원하는 풍의 그림, 만화, 일러스트뿐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생성 가능하다. 애니메이션은 내 GPU로 좀 오래 걸려서 일러스트까지만 생성해보고 있다. 여기서 잠깐. ‘그리다’가 아니라 ‘생성한다’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인공지능으로 그림을 만드는 과정은 절대 ‘그린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녀석이 생성한 그림은 내가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도 그리기 힘든 고퀄리티라서 요즘은 그림 쪽으로 진로를 잡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매우 감사한다.
물론 인간의 창의성과 손맛은 사람들이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고 컴퓨터 기술을 좋아하는 나도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에 약간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점점 더 디지털 그림 도구들에서 멀어지고 붓과 종이를 이용한 아날로그적 그림에 더 빠져드는 것 같다. 연수를 가면서도 느끼는 것인데, 국어나 미술과 같이 인간의 창작을 중시하는 과목의 경우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나 그림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반드시 변형해야 하며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법적인 문제와 별개로) 저작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인공지능 개발자나 이것을 공부하는 이들은 인공지능이 만든 산출물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저 인간을 얼마나 잘 모방하고 그 퀄리티를 높일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컴퓨터를 공부하면 알지만, 깃허브에서 코드 받아서 사용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으며 코드를 베낀다는 자체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오히려 내 코드를 써달라고 도큐먼트도 무척 상세하게 써서 제발 가져가 달라고 광고하는 편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을 모방하고 기술들을 서로 베끼고 발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가 기술을 어디까지 알고 이용하는지에 따라서 서로 취하는 스탠스 자체가 다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 인공지능 윤리와 법이 적립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인공지능 산출물이 쏟아지는 시대에 언젠가 첨예한 갈등 양상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싶다. 일러스트레이트 쪽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을 이용해 웹툰이나 표지를 그리는 것에 대대적으로 비토를 하는 분위기인데, 윤리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밥그릇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웹툰이나 게임 개발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인공지능 그림 툴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나 만화 작가들이 말도 못 해보고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네들끼리의 밥그릇 경쟁을 넘은 갑의 밥그릇 횡포(사실 그들에게도 기술의 발전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는 저항하기도 어렵다.
재미있는 것은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큰 분야가 과거에는 인간의 성역이라 여겨졌던 예술과 글짓기 분야이다. 인공지능은 그 사고방식이 절대 논리적이지 않다. 머신러닝의 학습 과정은 필연적으로 확률적이며 따라서 인간이 많이 생성했던 데이터들에 수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창의성이란 그 데이터들의 랜덤 한 조합이라 생각한다면 방대한 데이터와 난수표를 장착한 인공지능의 창작물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이제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한편에서는 인공지능이 개발자 자리도 위협할 거라는데, 어차피 인공지능도 컴퓨터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로 인해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술들이 개발되어야 하므로 앞으로도 개발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수학이나 물리와 같이 연역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의 경우 인공지능은 학습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사고를 어려워하기 때문에(사실 인공지능이 모델을 생성할 때 외에는 ’사고‘를 발전한다는 자체가 어렵다) 연역적 사고를 하는 학문 영역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물론 교과서에 있는 정도의 지식은 이미 인공지능이 100프로 정답만 이야기할 수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연역적 사고는 인공지능이 모르는 응용문제의 경우이다.
무엇보다, 나처럼 인공지능의 산출물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 아날로그로의 회귀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너무나 쉽게 클릭 한 번이면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수많은 고민과 붓질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처럼. 인공지능에 의해 사회가 편리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할 다른 아날로그적 취미나 일을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게 생산성으로 이어지려면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해서 어렵겠지만 말이다.
결론, 인공지능보다는 못 그려도 내 손으로 그린 그림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