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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e Oct 23. 2024

스물 여덟에 초등학생들과 백일장에 나갔다

그리고 졌다.

나는 어렸을 때 미리 받은 국어 교과서를 개학 전날 다 읽어 버리는 아이였다. 소설과 시를 다 읽고 학교에 가면 국어 시간이 애타게 기다려졌다. 일곱 장 남짓한 교과서 속 장편 소설은 대체 언제 배우는지, 이 소설의 앞뒤는 대체 어떨지 상상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읽기는 참 잘 했는데, 쓰기에는 영 열정이 없었다. 애들 다 나가는 백일장에도 나가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한국 나이 스물 여덟의 가을 어느날, 동네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보기로 했다. 이제 난 읽기에 더해 쓰기까지 즐기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로 분야가 나뉘어 있었다. 주제는 세 가지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여행으로 골랐다. 작년 치앙마이를 여행하면서 써둔 글이 있어서 조금만 다듬어 제출할 셈이었다. 내 이야기라 그런지, 진짜 재밌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얘기는 내 이야기다. 친구들한테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기 민망했던 것들을 흰 문서에 꾹꾹 눌러 담았다.


도서관 메일로 글을 제출했다. 나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들은 내 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업무로 수백 편의 글을 창작하고 메일로 주고 받아 왔지만, 그토록 기분 좋게 설레는 메일은 처음이었다. 화살같이 날아오는 피드백 없이, 탄생과 동시에 터져나온 우렁찬 생명력이 특수용액에 담겨져 죽은 듯 보존될 글이었다.


어느새 결과 발표일이 다가왔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직감적으로 백일장 생각이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OO도서관입니다. 백일장에서 장려상 수상하셔서, 시상식 참여 안내 드리고자 전화 드렸어요.


장려상이다!

... 사실 실망했다. 서울시 단위의 백일장도 아니고, 동에서 열린 작은 백일장에서 장려상이라니. 난 글 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인데, 장려상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최소 우수상은 바랬던 거만하고 배부른 직장인의 뒷통수가 얼얼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감사 인사를 건네고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수상자 명단을 확인했다. 대부분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내심 기다리던 시상식날, 내 경쟁자들을 확인하는 날이다. 일을 일찍 마치고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상식에 수상자로 참여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름 검은색 블라우스와 아이보리색 슬랙스를 갖춰 입었다. 동네 시상식이니까 구두까진 신지 않았다. 그 대신 신은 얄쌍한 새 운동화는 내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도서관에 달린 작은 야외 공간에서 시상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축하 공연도 있었다. 나름 시상식의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만의 작은 청룡영화제였다. 누군가가 시간과 열정을 바쳐 창작 활동을 했고, 까다로운 심사 위원의 선택으로 소수만이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되는 이 자리. 청룡영화제에 그 해의 핫한 아이돌의 축하 무대가 있다면 백일장 시상식엔 인상 좋은 푸근한 기타 연주자의 공연이 있다. 기타 연주자는 네모난 무테 안경을 쓰고 기타를 한 몸처럼 여겼다. 자유분방하게 긴 수염과 머리카락은 완전히 검지도, 희게 새지도 않았다. 그 노련한 색채가 그의 연륜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한 중학생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부러웠다. 우수상도 한 초등학생과 성인이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의 글이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왔다. 장려상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차례로 상장을 받아야 했다. 앞에 나가 줄을 섰다. 이상함을 느꼈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양 옆으로 같이 서 있는데 나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양 옆으로 돌리면 다른 사람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와 같이 수상한 친구들의 키가 내 허리쯤 오는 어린 초등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렬로 선 장려상 수상자들을 멀리서 보면 난 아마 그 아이들을 인솔하는 초등학교 교사에 가깝게 보였을 것 같다. 창피했지만 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인정받는 이 순간이 웃기기만 했다. 너희들도 개학 전에 국어 교과서를 삼키듯 한 숨에 읽어버리는 아이들이냐고 묻고 싶었다. 이모의 주책이다. 입 다물고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지 않으며, 상장을 받아들었다.


-장려상. 김 지 원. 내용은 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도 양옆에 선 아이들의 정수리가 보였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자리로 돌아와 가장 높은 상을 받은 중학생 친구의 수상작 낭독을 기다렸다. 한 여자 아이가 나와 직접 쓴 글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삼 분 정도 듣다가 자리를 떴다. 그 친구의 글은 내가 쓸 수 없는 것으로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오늘 내가 느낀 질투라는 감정에는, 내가 이젠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체념 한 스푼이 추가되어 다른 오묘한 맛을 내기 시작했다. 제 나이 때 쓸 수 있는 것들을 쓴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부럽다 얘들아. 이모는 이만 집에 가서 못다한 일을 하려고 해.


버스가 유난히 좌우로 흔들렸다. 2인석에 혼자 눕듯이 앉아 핸드폰 게임을 즐기는 남자 중학생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옆 혼자 앉는 자리에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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