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킴 Oct 19. 2023

영국에서 맨땅에 헤딩하기

디자인 인턴십을 구하기까지 7개월의 시간

2013년 9월 1일, 덜덜 떨며 영국땅을 밟았다. 만 24세의 나는 왼쪽 팔에 새긴 ‘초월’이라는 타투가 무색하게 걱정과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유학을 해 본 적도 없어, 한국에서 일한 경력도 없어, 영어도 잘 못해.
그렇다고 디자인 실력이 좋은가? 아직 학생티를 벗지도 못했어.
영국에 혈연, 지연이 있는 것도 아니야...
이런 내가 진짜로 영국에서 일을 구할 수 있을까?

한참을 이 생각에 갇혀 살았다. 눈꼬리와 입꼬리, 어깨까지 모두 아래로 쳐져 있었다. 첫 두 달 동안은 옥스포드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어학원을 다녔다. 그래픽 디자인 일을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나의 계획은 낮에는 학원에서 영어공부를, 저녁에는 집에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학원 끝날 때까지 포트폴리오를 완성한다면 런던으로 이동해서 바로 일자리에 지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했고 영어 숙제만 집에서 했다. 바로 전글에서 말했듯이 전형적으로 ‘책으로 배웠어요’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 덕에 영어 회화 실력은 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느냐? 하나도 못했다. ‘아,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완벽하게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로 자꾸만 미뤘다.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몽땅 놓치고 말았다.


11월, 어학연수가 끝나고 옥스포드에서 런던으로 이사갔다. 홈스테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4명의 사람들과 하우스쉐어를 했다. 한국 여자 2명, 영국 남자 1명, 이집트 남자 1명과 함께 낡은 2층집에 살았다. 화장실은 1개뿐이었고, 걸어다닐 때마다 계단은 삐걱거렸다. 모두 20대 중후반이었다. 한국인 하우스메이트는 모두 워킹홀리데이로 온 여자친구들이라 쉽게 친해졌다. 우리는 밤마다 마실 나가듯 동네 클럽이나 바를 배회하고 다녔다. 우리는 머나먼 땅에서 외로웠고 불안했다. 안타깝게도 놀던 그 순간을 즐겼던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한껏 꾸미고 왔으면 그저 재밌게 춤을 출 만도 한데 음악이 별로라는 이유로, 귀여운 남자가 없다는 이유로 인상을 팍 쓰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는 경우가 많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동안 영어실력을 늘려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옥스포드 홈스테이 아주머니가 추천하셨던 ‘옥스팜’이 마침 동네에 있었다. 옥스팜은 중고물품을 판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단체였다. 주 2회씩 그곳에 가서 일했다. 그곳에는 중년층의 봉사자들이 많았다. 악센트가 너무 다양해서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지만 다들 친절하셨다. 가나출신 아저씨, 이스트 런던출신 아주머니, 스페인출신 아주머니 등 그곳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다들 부유하기보다는 빈곤층에 가까워보였다. 허름한 옷에 투박한 말투를 썼지만 그들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단기 알바를 구하러 다녔다. 아무리 일을 못 구해도 절대 한국 가게에서 일을 찾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한국에서와 ‘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화 속에서 한국어를 하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필요할지언정, 이왕이면 내가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I’m a fast learner!(나는 습득력이 빨라!)”

하우스메이트 카림이 알려준 표현이었다. 알바를 지원할 때 그집 사장에게 이렇게 말하란다. 서투르지만 계속해서 저 문장을 읊조렸다. 동네 근처의 레스토랑과 카페, 펍을 돌아다니면서 이력서를 돌렸다. 계속해서 떨어졌다. 디자인 인턴은커녕 서비스 직업까지 다 떨어지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했다. 마음은 점점 더 영국의 겨울처럼 흐리고, 어두워졌다.


어느 날 술을 제대로 마셔본 적도 없고 펍문화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지만 집근처 펍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은 없고 직원만 있었는데 내가 알바를 하고 싶다고 하자 덜컥 기회를 주었다. 드디어 손님이 왔다. 나보고 손님에게 맥주를 줘보라고 했다. 덜덜 떨며 맥주탭에서 맥주를 내렸다. 컵에는 맥주거품이 수북하게 쌓였다. 손님에게 천천히 컵을 내밀었다. 펍 직원은 사장이 지금 CCTV를 통해서 나의 트라이얼을 보고 있고 결과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망한 것 같았다. 근데 정말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지금 한 트라이얼은 분명히 떨어질 것 같았지만 묘하게 조만간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싹텄다. 비를 오롯이 맞으며 알 수 없는 낭만을 느끼며 걸어갔다. 


역시나 펍 알바는 떨어졌다.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상을 이어나갔다. 옥스팜으로 봉사활동을 가고, 영국 드라마를 보며 영어공부를 하고, 꾸역꾸역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어느 오후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발품을 팔러 나갔다. 집근처 ‘오이시이’라는 일식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유럽계 젊은 여자애가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너네 혹시 알바 구하니?"

"음...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한테 말해볼게. 아마 구할 것 같아!"


그 아이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내 전화번호를 받았다. 드디어 일이 풀리려나?


다음날 전화가 왔고 2014년 3월,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돈을 받으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그 레스토랑은 음침했다. 일본식당이지만 일본인이라곤 웨이터 1명뿐이었다. 쉐프는 인도, 러시아에서 온 교육수준이 낮아보이는 남자들이었다. 매니저는 태국인이었다. 당시 최저시급은 £6.31이었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낮은 £5로 시급을 받았다. 내가 발끈하자 매니저는 내게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대신 현금으로 줄게!’

일을 구하기 힘든 외국인 노동자를 이용해먹는 곳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뻤다. 대학을 졸업하고 드디어, 영국에 와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시작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 기세를 몰아 드디어 디자인 일자리에서도 좋은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일식집 알바를 하면서 디자인 전문 구직사이트를 통해 완성한 포트폴리오를 보내기 시작했다. 주니어 디자이너나 그래픽 디자인 인턴십 자리가 보이면 모조리 지원했다. 계속 떨어진지 두 달정도 되었을 무렵 딱 두 곳에서 연락이 왔다. 두 곳 모두 스타트업이었다. 첫번째 회사는 인터뷰를 했지만 떨어졌고 두번째 회사는 아슬아슬하게 내게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원하던 주니어 디자이너는 이미 뽑았지만 내 포트폴리오가 인상 깊다며 인턴십을 해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곳이 내 첫 직장이 되었다. ‘월드 뉴스’라는 온라인 뉴스매거진 회사였다. 인턴으로 한 일은 기사에 필요한 인포그래픽(지도, 그래프 등)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어하던 디자인일까지 내 일상에 포함되었다. 이후 낮에는 디자인 인턴십을, 저녁에는 일식집에서 알바를 하였다. 


어렵게 바위에 금을 냈더니 결국 바위는 서서히 갈라졌다. 3개월 뒤 7월, 월드뉴스에서 정규직 디자이너가 되었다! 직원이 총 8명인 그 작은 회사에서 유일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점심 시간에 엄마한테 전화로 이 소식을 전하며 방방 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봉사활동에서 일식집 알바로, 일식집 알바에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장작 7개월이 걸렸다. 마치 지도에 표시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다. 불안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 결과였다. '이때 좀 덜 불안해하고 좀더 여유롭게 그 과정을 즐겼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렇게 능글맞게 변한 건 그때의 서툰 내가 있었기 때문이야'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소심하고 풋풋했던 그때의 나에게 고맙다. 수수야 정말정말 고생 많았다!




혹시 런던에 살 예정이신가요?

<런던 생생정보통> 한 번 읽어보세요!

https://kmong.com/self-marketing/552353/2DVS16Dh0C

매거진의 이전글 비건들 눈치 보던 점심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