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7년동안 마상당한 ENFJ
보통 친구들과 연락할 때 답장이 빠른 편인가?
나는 한국애들에게는 늦어도 다음날까지 답장하지만 영국애들에게는 2-3일 뒤에 답을 보낼 때도 있다. 왜 속도가 다르냐고? 영국애들은... 답장이... 정말 정말 느리기 때문이다. 내가 칼답을 해도 어차피 또 답이 느릴 것이기 때문에 나도 천천히 내 할 일 하고 보내는 편이다. 3일 내로 답장을 받으면 다행인 거고, 보통 읽씹하거나 몇 달 뒤에 답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번에 그걸 오랜만에 경험했다.
얼마전 전직장동료 A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A는 내가 일했던 영국회사에서 5년동안 같은 층에서 일했던 사이다. 도도한 고양이상으로, 영국 백인 여성 특유의 새침한 외모였다. 그 회사를 다니는 동안 A와 썩 친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스몰토크를 하곤 했다. 인스타그램으로 가끔 서로의 스토리에 메시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12월, 인스타그램에 A가 서울에 왔고 3개월동안 이곳에 머문다고 글을 올렸다. 살짝 고민이 됐다.
'애매한 사이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A를 한 번 만나야 하는 걸까? A도 인스타그램 통해 내가 서울에 사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영국 특유의 낯가림 때문에 내가 인사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한편으로 많이 친한 사이도 아닌데 오지랖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른 친구를 통해 A도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게 됐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먼저 A가 서울에 대해 올린 글에 댓글을 남겼다.
서울을 좋아하니 다행이다~!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담에 커피 한 잔 하자~
3일 뒤에 답글이 달렸다. '오 정말? 그래도 될까? 좋아~' 기쁜 마음으로 다시 답글을 달았다. '내가 서울 돌아가면 DM 보낼게~' 그리고는 일주일 뒤에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다음주에 커피 한 잔 할까?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일이 지나도 그녀는 연락이 없었고 지금도 연락은 없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이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A는 내가 보낸 인스타 메시지는 안읽씹하고 여전히 스토리와 그리드에는 줄기차게 서울 좋아를 올리고 있었다. 참 기분이 나빴다. 부담스러우면 바빠서 못 만난다고 답장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여기서 잠깐 나의 친화력 레벨을 소개하자면,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다. 사람을 좋아한다. 근데 영국에 갔더니 유럽, 아시아, 한국사람들과는 쉽게 친해졌는데 이상하게 영국 백인은 그들과 나 사이에 막이 있는 듯 친해지기 힘들었다. 영국 백인 위주였던 전 회사에서는 내 친화력치고 적은 수의 친구만 사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반화를 하기엔 안타깝지만 현재 내 마음 속에는 이런 가설이 있다.
'영국 백인은 친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약속/연락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이 가설을 깨고 싶어서 A에게 용기 내서 연락한 것도 있었다. 내 가설을 깨기는 커녕 확신의 데이터를 쌓아주고 갔지만...^^ 내 가설은 3단계를 통해 확립되었다.
워킹홀리데이로 처음 영국에 가자마자 그들의 사회 속으로 바로 들어가긴 쉽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된 영국 회사를 다니지 않았기에 내가 접한 영국인들은 같이 사는 하우스메이트 1명과 데이팅앱에서 만난 남자들이었다. 첫번째로 하우스 메이트 조지. 1년동안 함께 산 결과 사회성이 참 부족한 애라 걔를 통해 영국인을 판단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패스.
다음으로 데이팅앱 영국인. 이왕이면 현지인을 만나고 싶어서 데이팅앱에서 주로 영국 백인 남자들과 매칭했다. 이제는 데이팅앱의 특성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초반에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매치가 되도 대화할 확률은 50% -> 대화를 시작한다. '안녕, 하우 알유?' '예스 아임 굿, 유?' 그 다음으로 진행될 확률 30% -> 다음 말주머니로 넘어가면 늘 반복하는 소개인사. '난 한국에서 왔어. 영국에 온지는 n년됐어'로 소개 후 상대와 한국관련 얘기 몇 번 오고 간다. -> 그리고 나서 지속될 확률 10%. 이 10%중에 실제로 만날 확률도 5%. 그동안 데이트 당일에 수없이 약속취소 문자를 받았는데 가장 흔한 문자는
Sorry, something came up.
(미안, 무슨 일이 생겼어)
Sorry, blah blah blah. Could we take a rain check?
(미안 어쩌구저쩌구~ 우리 다음으로 미뤄도 될까?)
연락은 띄엄띄엄, 약속을 잡아도 만나기 힘들고, 데이트 후 고스팅(잠수)은 다반사.
그래... 데이팅앱이어서 그런 걸꺼야. 물고기가 그렇게 많은데 나 하나 신경 안 써도 상관 없는 세계잖아~ 쿨해지자. 쿨해지자. 마음을 다독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제 뉴스레터 웹버전 14번 글 참고하세요.)
https://maily.so/ss.in.london/posts/a0908045
서로에게 낯선 데이팅앱에서만 무례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친구 사이에도 읽씹과 느린 답장은 똑같았다. 영국에 맨땅헤딩한 내가 안전한 방법으로 영국인을 만날 곳은 직장밖에 없었다. 5년간 한 회사에서 일하며 네다섯명의 백인 동료와 친구가 되었지만 아시아계 친구들만큼 친해질 수는 없었다. 연락해도 답장 속도가 느리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제안했던 약속날짜가 지나서 답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시로 내 왓츠앱(외국판 카톡) 화면을 공유한다.
빨간 네모를 보면 알 수 있듯 내가 2월 24일에 문자를 보냈는데 4월 5일에 답장이 왔다! 참고로 이 친구는 가장 친한 영국 백인 중 1명이다. 답장이 온 것도 감지덕지다 정말. 이 친구를 포함해 읽씹을 하는 경우가 오히려 흔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전에 보냈던 내 문자는 무시하고 바로 안부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나도 점점 그들과 비슷해지고 있고... 다만 아시아 친구들만큼 친해질 확률은 적겠다는 체념을 했다. 그래도 막상 만나면 잘 노니까~ 1군 아니고 2군 정도의 친한 사이를 유지할 것 같다.
그런데 황당한 건 공적인 기관과 연락할 때도 똑같았다. 이제 화를 넘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었다. 회사에서 취업비자를 해줄 때부터 이메일 답장이 너무 늦었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내 불확실한 앞날에 엄청 초조한 상태였다. 진행 상황을 일주일 기다려도 답이 없어서 독촉메일을 한 세 번은 보냈었다. 그렇게 취업비자를 받는 과정이 3개월 정도 걸렸다.
겨우 취업 비자를 받고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회사에서의 소통은 정말 답답했다. 메신저건, 이메일이건 여기서는 참 읽씹이 흔했다. 심지어 내가 작업한 애니메이션에 피드백을 줘야 하는 매니저들조차 읽씹을 했다. 그 작업이 회사 내부 프로젝트라서 그런지 아예 무시하고 나중에 다른 급한 작업이 생겼을 때 새로 말을 걸었다. 참고로 매니저들은 지방에 있는 본사에 있고 내가 런던에 있어서 원격으로 소통해야 했다. 근데 이건 나만 겪는 게 아니라 아예 회사 자체의 이상한 문화 같았다. 다른 동료들도 '답장이 없어'라고 하는 말을 수십번 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일하는 다른 한국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걔네 동료/매니저가 답은 느리더라도 미팅을 펑크내거나 읽씹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내가 일한 회사 디지털 부서가 유독 심한 편이었던 것 같다. 나의 마지막 매니저는 정말 고스팅(잠수타기)의 대가였다. 코로나 이후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고 나니 그 점을 더 악용했다. 미팅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답장도 잘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리드해야 할 때에도 처음과 끝에 잠깐 참여하고 잠수를 탔다. 그 사람이 내 퇴사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건 당연했다.
근데 퇴사 후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작업 후 피드백을 이메일로 요청하면 답이 안 온다. 나는 마감기한에 맞춰서 일하는데 피드백 기다리느라 며칠을 보내면 작업시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독촉 메일을 또 보내야 한다.
집문제에서도 그랬다. 내가 3년 살던 아파트의 부동산 매니저는 그나마 답장을 잘 해주는 편이었다. 어느날 우리집 냉장고에 문제가 생겼다. 매니저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며 냉장고를 교체할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약속한 그날 나는 재택근무를 예약하고, 냉장고와 냉동고에 있던 모든 식재료를 거실 테이블에 내놓고 기다렸다. '제때 오겠...지?'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 하지만 내 불안은 적중했다. 그날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결국 다음주로 다시 예약해야 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다. 7년 살며 집에 문제를 고치러 온 사람들 중 한 번에, 제시간에 온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영국에서 욕이 참 많이 늘었다.
물론 답장이 빠르고 약속을 지키는 영국인들도 있다. 그런데 비율로 따졌을 때 한국과 비교하자면 그 비율이 정말 낮다. 한국에서는 그게 데이트 약속이건, 친구와 약속이건 늦어도 하루이틀 내로 답이 오는 편이다. 특히 일과 관련된 거라면 연락이 빛의 속도로 빠르지 않나? 클라이언트와 밤늦게까지 연락하는 것도 부지기수인 걸로 알고 있다.
최근 세계적인 데이팅앱 회사 틴더(Tinder)에서 국가별 사용자 답장 속도를 조사했는데 한국이 1위라고 했다. 역시 빨리빨리의 나라! 그러니까 내가 영국에서 겪은 좌절감은 유난히 급한 나라 사람이 모든 게 상대적으로 느린 나라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근데... 3위가 영국이라고 하길래 데이터의 신뢰성이 급추락했다. 그게 사실이면 영국 다음으로 있는 나라들은 봉화시대인가!
한편으로 인종차별적 의문이 지워지지 않아. 영국 백인끼리도 연락이 늦거나 씹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동양인 =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읽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요즘엔 다른 사람이 답을 안 해도 신경 안 쓰는 한국친구들도 꽤 있다. 반면 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답장이 없는 것에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고 1시간 내로 답장 안 하면 화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루이틀까지는 기다릴 수 있다. 근데 일주일이 지나도 답장이 없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을 품게 된다.
'많이 바쁜가?''무슨 일 있나?'에서부터
'내가 뭘 잘못했나?'
'시간이 걸려도 답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냥 무시해도 아무 상관없는 거야?'까지
점점 단순한 의문에서 화로 바뀐다.
근데 이렇게 읽씹하고 약속을 잘 안 지키면 대체 영국 백인들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 걸까? 7년간 고민 또 고민하며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영국인은 낯가림이 심하고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백인은 소수의 찐친들에게만 연락을 자주 하고 그 외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가설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 있는 친한 친구들은 죄다 한국인 or 아시아계 친구들이다. 그럼 이제 영국으로 돌아가는 나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나의 미션은 아래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가설을 깨부술 영국 백인 찐친을 사귀어보자!
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되, 몇 명 추려서 깊이 연락해볼 것
읽씹, 약속취소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하기. 그들의 문화려니 생각하기
나는 사실 내가 세운 가설이 싫다. 너무 부정적이다. 영국은 워낙 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나라라 일반화하기 어렵기도 하고... 분명히 연락이 잘 되고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 머릿속에 자리잡힌 이 관념을 부숴버리고 싶다. 원래 알던 친구들과도 잘 지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영국백인을 포함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새롭게 찐친이 되려고 노력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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