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점 & 아쉬웠던 점 & 배운 점
2탄에서는 예고한 대로 러쉬에서 일하며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적어보겠다.
혹시 1탄을 안 봤다면 아래 링크 클릭!
https://brunch.co.kr/@soosookim/28
먼저 가장 좋았던 점은 복지 제도이다. 일단 장비! 러쉬는 전직원에게 맥북을 제공했다. 특히 나는 영상과 그래픽을 다루었기 때문에 가장 큰 수혜자였다. 맥북, 27인치 아이맥, LG 모니터에 타블렛과 아이패드까지 사줬다. 퇴사 후 저것들 다 돌려주고 새로 사느라 돈 꽤나 쓰긴 했지만... 원래 맥에 대해 잘 몰랐는데 러쉬 덕에 맥제품이 다양하며 아름답고 기능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번째로 러쉬제품을 쓸 수 있는 특권도 마음껏 누렸다.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한 번도 사본 적 없던 러쉬 제품을 원없이 써보게 돼서 매번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천연재료에 달콤한 향, 알록달록한 색깔에 눈까지 즐거우니 금세 러쉬제품에 퐁당 빠져버렸다. 내가 지나가면 러쉬향이 날 정도로 언제나 러쉬제품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세계 러쉬 매장 어딜 가도 50% 할인을 받을 수 있었지만 본사에서 특권을 많이 받다보니 직접 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회사 메신저로 ‘지금 웰컴존에 무료 제품들 올려놨으니 가져갈 사람들 가져가세요!’라는 메시지가 자주 올라왔다. 늘 줍줍하러 바로 달려갔다.
정기적으로 ‘스테프 세일 백(Staff Sale Bag)’이라는 이벤트도 실시했다. 가방 1개에 £5(약 8500원)였고 인당 최대 3개까지 구매할 수 있었다. 가방에는 랜덤으로 고른 러쉬제품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B급, 디스플레이용 제품 등 쓰기에 괜찮지만 외부엔 팔 수 없는 제품들이었다. 판매비용은 자선기관으로 가니까 제품처리도 하고, 기부도 하는 윈윈 문화였다. 본사 풀(Poole)에 있을 때엔 더 기회가 많았다. 제조공장이 근처에 있어서 가방이 아니라 아예 큰 상자에 한 가득 담아서 주었다. 샤워젤, 배쓰밤, 버블바, 샴푸, 비누 등 향긋한 보물이 넘쳤다. 그렇게 얻은 제품은 주변 친구들에게 선물용으로 막 뿌리기에 좋았다. 나는 집에서 하우스 파티를 열 때마다 손님들에게 웰컴 기프트로 하나씩 주곤 했다.
세번째로 5년동안 야근한 적이 거의 없었다. 큰 행사가 있을 때 잠깐 밤에 일한 정도가 야근이었다. 진짜 늦게 끝난다 하면 6시나 6시 반. 그때쯤이면 나빼고 다 퇴근해서 사무실이 텅 비어있었다. 대부분 9시에서 5시까지 일했고, 주어진 일만 마감내로 하면 꼭 8시간 전부를 채울 필요도 없었다. 한국은 점심시간을 빼고 8시간이지만, 영국은 점심시간 포함 8시간이라 실제 근무시간은 7시간이다. 재택근무도 자유로웠다. 영국은 택배도둑이 많아서 집에 있을 때 바로 받는 게 흔하다. 택배 받을 게 있을 때마다 매니저에게 말해서 일주일에 한두번 재택근무를 했었다. 코로나 이후 매일 재택근무를 하였고 요즘에는 재택과 출근 자유롭게 한다고 한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러쉬 런던 사무실에서는 늘 재밌는 이벤트를 벌이곤 했다. 주 1회는 꼭 저녁마다 인권영화제, 북클럽 등의 이벤트를 열곤 했다. 오후 5시 이후에 사내 직원은 퇴근해도 됐지만 나는 종종 남아서 이벤트에 참여했다. 무료로 칵테일도 마시고 제품을 선물로 받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특별한 날도 아닌데 동료들끼리 'Goth Day(고스족 데이)'를 만들어서 올블랙을 입고 온 날도 있었다. 나도 진짜 고스로 보이기 위해 보라색 립스틱까지 칠하고 갔었다.
*고스족: 1970년대 말 영국에서 나타난 하위문화 집단. 검은색 옷을 입고 다크서클과 검붉은 입술을 강조하는 화장을 즐긴다. 참고로 영국에서 고스족은 여전히 흔함
휴가는 공휴일 8일 포함 1년에 총 25일이었다. 나중에 휴가 구매 제도가 생겨서 최대 5일까지 추가로 구매할 수 있었다. 연차가 쌓이면 휴가수는 점점 늘어났다. 나는 매해 무조건 5일 구매해서 1년에 총 33일을 쉴 수 있었다. 여기서 구매를 한다는 것은 월급에서 몇 % 깎는다는 말인데 난 쉬는 게 더 좋아서 깎여도 마냥 좋았다. 영국은 2주 휴가 내는 것도 흔하다. 나는 연말마다 2주 휴가 내고 한국에 다녀왔다. 내가 휴가 간 사이를 대비해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에 걸리면 2주 유급휴가를 낼 수 있었다. 나도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는데 많이 아프진 않아서 2주 동안 드라마를 보면서 편히 쉬었다. 그 외 병가 내는 것도 좀 자유로웠다. 영국에서는 왠지 1년에 병가 한 번 안 내면 아쉬운 듯한 느낌일 정도로 사람들이 아프다고 거짓말 한 번쯤은 하는 것 같다. 나는 병가라기보단 오전에 할 일이 있으면 두시간 늦는다고 하고 두시간 더 늦게까지 일하기도 했다. 긴 휴가 외엔 주말 껴서 2일씩 휴가를 내서 주변 유럽 국가에 놀러갔다오곤 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간 것 같다. 한 달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마음이 아련해진다. 참 좋았던 시절이다...ㅎㅎ
복지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좋았던 점은 회사 철학이었다. 러쉬는 동물실험에 반대하고 환경을 위해 힘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환경을 지키겠다고 말만 번지르르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진심으로 행동하는 회사는 처음 봤다.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병에 담긴 액체 대신 샤워젤, 치약, 샴푸 등을 고체로 만든 최초의 회사이다. 이벤트를 할 때엔 무조건 비건과 베지테리안 음식만 제공한다. 유튜브 영상작업할 때엔 친환경적이지 않은 경우 종종 반려당하곤 했다. 예를 들면 일회용 화장솜을 쓴 장면을 다회용 천으로 바꿔서 촬영하라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간식도 과일, 견과류, 대체우유(아몬드, 두유 등) 등 건강에 좋은 것들이었고, 청소용품도 다 친환경 제품을 썼다. 영국은 분리수거를 잘 하지 않는데 러쉬 사무실 안에서만큼은 쓰레기통이 다양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회사 밖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까지 적극적으로 환경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애사심은 이런 데서 오는 것 같다! 러쉬는 영국 내에서조차 진보 중의 진보인 회사였던 것 같다. 전에 일했던 회사나 다른 친구들 회사 들으면 이 정도로 환경과 다양성에 열려있지 않았다. 처음엔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내 나도 이들과 같은 과라는 걸 알고 점점 스며들었다. 러쉬에서는 자유, 평등, 환경, 다양성 메시지가 뚜렷했다. 여성, 성소수자부터 난민까지 모두 응원했고, 나의 몸 그대로를 사랑하자는 바디포지티브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사내 화장실은 남자, 여자가 분리되어 있다가 성정체성이 다양한 요즘 시대에 맞춰 유니섹스로 바뀌었다. 각 칸마다 세면대가 있어서 불편하지 않았다. 이렇게 러쉬는 알고보니 내가 지향하고 있었던 가치관을 강하게 일깨워준 곳이다. 그래서 러쉬를 다니는 많은 직원들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에 맞는 곳을 다니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나 또한 오래 다닌 이유가 이 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동료들은 게이, 페미니스트, 트렌스젠더, 레즈비언 등 다양했다. 제모 없이 당당하게 풍성한 겨드랑이털을 드러내고 나시티를 입는 여자 동료, 가죽 부츠인데 비건인 제품을 찾아다니던 동료 등 자기 가치관에 맞춰 당당하게 사는 동료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회사라서 좋았다.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러쉬는 스파 서비스도 있다. 싱잉볼 소리를 들려주고 귀에 촛불을 꽂는 사운드 배쓰, 비틀즈 음악에 파자마를 입고 받는 마사지, 마사지사 2명이서 70분동안 마사지해주는 코스 등 러쉬만의 독특한 컨셉으로 몸과 마음을 풀어준다. 본사 내에서 연습용으로 무료로 마사지 받을 사람을 구하거나 근무시간에 20분 마사지 이벤트도 있었다. 러쉬에서 가장 유명한 배쓰밤 또한 뜨거운 물에 입욕제를 넣고 몸을 푹 녹이기 위한 제품이다. 러쉬 앱에는 배쓰밤 제품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명상 플레이리스트까지 있다. '이거 사세요!'라고 상업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콘텐츠 위주로 작업하는 게 참 뿌듯했다.
그러고보니 러쉬는 웰빙의 중요성을 러쉬만의 개성으로 잘 표현하는 회사인 것 같다. 그냥 샤워용품을 파는 게 아니라, 문화와 분위기까지 전파한다. 이것이 바로 브랜딩인가!
물론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첫 번째로 글로벌 회사라는 명성에 비해 본사에는 인종 다양성이 부족했다*. 본사가 지방이라 그런지 그 지역 토박이 출신인 영국 백인이 대부분이었다. 지방 경제에 기여하는 건 바람직해 보였지만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는 적응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바로 영국 백인들 특유의 낯가림.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아도 아예 등을 돌리는 동료들이 꽤 있었다. 또 아무리 한 팀이라고 해도 친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애들이 많았다. 나도 동료 A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사무실에서 A를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했을 때는 정말 섭섭했다. 다시 한번 끼리끼리 문화가 심하다고 느꼈다.
*요즘엔 러쉬 내 외국인 및 다른 인종 비율이 더 커진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풀(Poole)에 있는 사람들 위주로 회사관련 정보가 도는 것도 아쉬웠다. 런던 사무실도 본사의 확장판인데 프로젝트 브리핑이 런던까지 전달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프로젝트가 시작하고 나서야 뒤늦게 합류하는 게 다반사였다. 나같은 경우 오래 일했는데도 기획부터 참여하지 않고 마감이 코 앞이 되어서야 타이틀 애니메이션을 해달라고 부탁받곤 했다. 나도 주도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큰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는 내게 묻지도 않고 아예 탑 프리랜서 아티스트에게 맡겼다. 내게도 기회를 주고 지원해준다면 거액을 내야하는 프리랜서보다 훨씬 효율적이었을 텐데... 아쉬움은 점점 커졌다.
지나치게 수평적인 것이 때로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비디오 에디터 동료들이 내 영역인 모션 그래픽에 손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 편집이 전문인 애들이라 디자인도 모션도 다 어설펐다. 잘 지내는 사이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내 영역을 침범하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럽고 난감했다. 근데 내 매니저는 디자인 전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매니저에게 이걸 보고해도 이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 사내에 '회사에 있는 누구든 분야에 제한 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요상한 시도가 있었다. 즉, 스쿼드(팀)를 만들고 그 스쿼드 내에 있는 팀원들끼리 담당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모든 역할을 수행해보자는 의도였다. 기획하던 사람이 디자인을 할 수도 있고, 카피라이터가 촬영을 감독할 수도 있는 굉장히 실험적인 시도였다. 결국 흐지부지 됐지만, 이런 분위기 탓에 어떻게 해결할지 더 난감했다. 나 스스로 겨우 용기 내서 해당 에디터에게 1:1 면담을 요청해야 했다. 이때는 정말 지위와 역할이 철저히 나누어져 있는 전통적인 회사가 그리울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다닌 5년은 개인적으로 황금기와 암흑기로 나눌 수 있다. 내가 처음 시작한 2017년부터 2년정도가 황금기였다. 그때는 지원이 정말 빵빵했다. 모션그래픽 트레이닝비도 지원해주고, 3개월에 한 번씩 보너스가 나왔고 연봉도 요청하면 올려주었다. 그때 매니저 두 분이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2년동안은 암흑기였다. 기존 매니저 두 분이 러쉬를 떠나고 다른 매니저가 생긴 이후부터였다. 그는 나를 포함해 다른 팀원들을 키워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코로나 이후 2년만에 요구한 연봉 인상도, 승진도 시켜주지 않았다. 팀원끼리 갈등이 있어도 잠수타고 있다가 갈등이 해결되고 나서야 나타나는 유령이었다. (코로나 때 원격으로 일하느라 오직 디지털로만 소통했었음) 게다가 러쉬는 거대 SNS 플랫폼에 휘둘리지 않겠다며 유튜브를 제외하고 SNS 계정을 모두 닫았. 러쉬 설립자들은 상업적 광고를 지양하기 때문에 마케팅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들 같았다. 그들에겐 소셜 미디어를 닫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결과 내가 일할 비중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디. 그러니 승진을 시켜달라고도 연봉을 올려달라고도 하기 민망했다. 나의 커리어는 점점 고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쳐 있었다. 7년이 넘는 해외 생활에 외로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위에 썼듯 러쉬에서 복지가 좋았던 반면 소외감이 들 때가 있었고, 회사 밖에서의 생활 또한 외로웠다. 친구들은 많았지만 오랜 동안 데이트는 잘 풀리지 않았다. 점점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부모님이 있고, 나와 똑같은 한국인이 사는 한국이 그리워졌다. 지친 마음으로 꾸역꾸역 버티다가 영주권을 받자마자 러쉬에게 작별을 고하고 한국으로 바로 돌아왔다.
전반적으로 러쉬는 여전히 내게 기적같은 선물이었다.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몇 가지 얘기해보자면 일단 러쉬 덕에 가치관이 확장되었다. 환경에 대해 생각하는 폭이 너무 넓어져버린 탓에 한국 회사에 와서 한숨을 많이 쉬게 되긴 했지만... 그만큼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 나만 생각했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였다. 회사가 소호에 있었기 때문에 근무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트럼프에 대항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한국 회사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텐데 땡땡이친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설립자들은 더하다. 정치, 사회에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때로는 제품과 관련없는 캠페인을 벌이고 욕을 먹기도 한다. 이렇게 설립자부터 동료까지 정치에 적극적인 모습에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사회 의식이 생겨났다.
두번째로 절대적 기준에서 자유로워졌다.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한 작업을 전세계 날고 기는 아티스트들과 비교했다. 자기검열을 하며 너무 못한 것 같아 자신감이 없었다. 매니저에게 보여줄 때 쭈뼛쭈뼛했다. 근데 러쉬 내에 다른 디자이너들이 한 작업을 보다 보니까... 나보다 못하는 것이다! 좀 놀라우면서도, 자신감이 생겼다. '아!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게다가 내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다른 부서 영국 동료들 또한 결과물에 너그러웠다. 그들도 디자인 보는 눈이 있겠지만 절대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처음 2년동안은 걔네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시간이 흐르면서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은 사내에 쓰일 것이지, 외부에 쓰일 예정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세계 최고 기준이 아니라 이 회사에서 필요한 수준만큼만 하면 잘 한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칭찬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니까 정신적으로도 점점 편안해졌다.
세번째로 나대는 것을 배웠다. 내가 일한 초반 비디오팀에는 영상 에디터가 두 명이었다. 근데 그 에디터 중 한 명의 링크드인 프로필에는 'Head of Video Production(비디오 프로덕션 팀장)'라고 적혀있었다. 심지어 비디오 프러덕션팀 매니저, 즉 자기 상사가 따로 있는 애가 헤드라고 쓴 것이다. 자기 첫 직장이면서 뭔 헛소리야? 그렇게 되면 나도 뭐 'Head of Motion Graphics'라고 써도 되겠다? 나머지 한 명은 러쉬 퇴사 후 스타트업 회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크리에이티브였다. 근데 그 아이의 링크드인 프로필에도 'Head of Creative'라고 적혀있었다. 얘네 둘다 갓 사회에 나온 파릇파릇한 20대 중반이었는데 말이다. 이걸 보고 와... 역시... 백인 남자들처럼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정도 허풍은 아니지만 내세울 게 있으면 조용히 있지 말고 무조건 내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나댈 수밖에 없던 이유는... 영국은 연봉을 올려달라고 해야만 올려주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내향적이었다. 나 빼고 다 영국애들이니까 영어를 못한다는 위축감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근데 연봉을 올려달라고 직접적으로 얘기까지 해야하니 너무너무 민망했다. 내가 낸 비책은 이거였다. 연봉 협상 요청 PPT! 나는 평소에 문서로 정리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MBTI 수퍼 J임) 원하는 연봉 금액, 포지션 그리고 근거로 내가 여태까지 한 작업을 촤르륵 올렸다. 영어로 말을 잘 못하는 대신 문서로 잘 정리해서 내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매니저에게 연봉인상 요청 이메일을 보내면서 이 파일을 첨부했다. 5년 일하면서 이 방식으로 두 번 요청했는데 음, 결국 매니저에 따라 결과가 다르긴 했다. 황금기 때 매니저는 오케이해줬고, 암흑기 때 매니저는 내 문서 내용 언급도 없이 그냥 안 된다고 했다. 뭐 결과가 어찌됐든 이런 문서를 만들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나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생각한다.
조급하고 인내심이 없는 편인 내가 취업비자로 묶여버린 탓에 한 회사에 5년이나 다니게 되었다. 5년동안 힘들 때마다 취업비자로 쉽게 그만둘 수 없는 환경이 답답했지만 그 덕에 이렇게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는 회사원을 오래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없을 것 같은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세계를 확장해준 회사 러쉬에게 고맙다.
위 글은 제가 정기적으로 보내고 있는 뉴스레터 <그래서 영국이 어땠냐면>의 원문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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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런던에 살 예정인가요?
장은 어디서 보고, 생활용품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집은 또 어떻게 구하지?
막막하시죠 ㅜㅜ 매번 검색하는 것도 피곤하실 텐데요~!
제가 최근 야심차게 준비한 <런던 생생정보통>을 공개합니다!
집구하기, 런던의 대중교통, 핸드폰 개통부터 구직사이트, 로컬들이 잘 아는 미술관, 작업하기 좋은 카페 등 7년 런던 현지인으로서 깨알 정보를 정성껏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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