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일은 뭐고, 내 모션 그래픽 수준은?
#영국취업
요며칠 따뜻한 날씨에 드디어 서울에 봄이 오고 있는 걸까? 설레려는 순간 미세먼지가 심해지고 비가 추적추적 오는 게 기분이 영 봄스럽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러쉬 본사에서 일한 경험을 나눠보고자 한다. 1탄, 2탄으로 나눠서 쓸 예정!
나의 구직 과정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로 이전글을 읽고 와도 좋다.
https://brunch.co.kr/@soosookim/27
이전글에 자세히 나와있지만 여기서 짧게 요약하자면
구인광고 보고 정규직 모션 디자이너 지원
한달 뒤 답장이 왔음. 프리랜서 제안받음.
프리랜서 작업
잡 오퍼 받음
면접부터 봤던 다른 회사와 달리 러쉬에서는 먼저 일부터 같이 한 것이다. 다른 회사에서 과제를 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아예 프리랜서로 일을 같이 하자고 한 적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돈도 많이 주고 취업비자까지 해준 회사라 러쉬는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고마운 회사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러쉬가 내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러쉬제품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강남역 지나갈 때 보이던 검정 앞치마를 맨 극외향 직원들이 거품을 만져보라고 한 것만 봤었지 구매해본 적은 없다. 왜냐면! 대학생에겐 너무 비쌌으니까 ㅜㅜ
혹시 러쉬를 잘 모를 수도 있으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러쉬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고, 천연 재료를 이용하여 비누부터 각종 세면제품을 만드는 회사다. 플라스틱을 포함한 각종 포장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친환경 브랜드이다. 특히 욕조에 던지면 폭탄처럼 파지직 소리를 내며 녹는 입욕제인 '배쓰밤(Bath Bomb)'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및 여성 등을 위한 인권 평등, 자유를 적극적으로 외치는 곳이다. 영국에 본사가 있고 미국, 캐나다, 한국, 일본 등 전세계에 매장이 있다. 특이한 점은 다른 거대 화장품 기업처럼 광고를 하지 않고, 주식으로도 내놓지 않고 여전히 설립자들이 브랜드를 꽉 쥐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전 회사 경험이라곤 런던의 조그마한 뉴스회사에서 2년정도 일한 게 다였다. 그것도 그래픽 디자인일이었지 모션 그래픽일이 아니었기에 벌벌 떨면서 2017년 1월 러쉬에 첫 발을 디뎠다.
러쉬는 한 마디로 자유로웠다. 내게 처음에 다가왔던 그대로, 살랑이는 날개옷을 입은 요정같은 회사였다�� 본사는 런던이 아닌 풀(Poole)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었다. 설립자는 7명 정도인데 그분들이 풀에서 러쉬를 처음 시작한 이후로 쭉 본사는 이 작은 마을 풀에 있다. 이곳은 가히 러쉬 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 러쉬의 제조, 디지털, 리테일, 재정, 법률 등 모든 부서가 작은 건물 스무채 정도로 퍼져 있다. 공장을 빼고는 우리나라처럼 간판을 직접적으로 달지 않아서 그냥 보면 잘 모르게끔 동네에 아주 조용히 퍼져 있다. 내가 일했던 건물은 러쉬 디지털로, 그 중 가장 큰 사무실이었다(지금은 또 달라졌다고 함). 실리콘 밸리 회사처럼 널찍한 통유리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탁 트이고 넓은 공간에 파스텔톤 소파나 서서 일할 수 있는 테이블, 원형 테이블 등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다양했다. 고리타분한 회사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위워크(WeWork)’같은 느낌이랄까? 화장실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향기가 좋은 화장실일 것이다. 그 유명한 러쉬 비누에서부터 핸드크림, 핸드스크럽, 샤워젤, 향수, 바디스프레이 등 온갖 러쉬 제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손을 비누로도, 스크럽으로도 씻고, 핸드크림 바르고 바디 스프레이까지 뿌리고 나왔다. 화장실에 갔다와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말이다ㅋㅋ
알고 보니 나는 여러 면에서 유일했다. 몇 없는 외국인 겸 동양인이었고, 유일한 모션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참고로 모션 그래픽이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래픽으로, GIF같이 움직이는 이미지나 영상 타이틀 애니메이션 등의 작업을 말한다. 근데 대기업이지만 놀랍게도 북미와 한국 빼고 다른 나라 러쉬 사무실엔 나같은 모션 디자이너가 없었다. 그 덕에 내가 만든 작업은 파급력이 컸다. 내가 만든 영상이 언어만 바뀌어서 전세계 다른 나라 러쉬 플랫폼으로 퍼지곤 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캠페인 관련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면 늘 편집가능한 버전의 원본파일을 다른 나라 SNS 매니저들에게 공유해야 했다.
대기업이라고 하니까 내가 막 모션그래픽 엄청 잘했을 것 같지 않나? ㅎㅎㅎ 솔직히 말하겠다. 내 수준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5년 일하면서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시작할 때는 거의 신입 수준이었다. 그래서 부담감이 컸다. 내가 유일한 모션 디자이너이고, 내 주변 모션그래픽하는 친구들처럼 엄청 기술이 뛰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놀라운 사실은!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디자인 전문회사(에이전시)만큼 날고 기는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화장품 전문 회사면 화장품을 전문적으로 제조할 줄 아는 직원은 높은 수준을 요구하겠지만, 마케팅은 상대적으로 세계최고급으로 잘하는 수준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적당히 할 줄 알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를 뽑았을 거다. 단지, 센스만 좀 있으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기술이 뛰어나지 않은 대신 스토리텔링을 잘한다든가, 그래픽 스타일이 개성이 있다든가 하는? 더군다나 나 또한 그렇~게 최고의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워라밸이 좋은 곳을 원했을 뿐이다. 퇴근 후 재밌게 놀 시간! 그러니까 적당한 연봉을 줘도 되는 러쉬 & 워라밸을 원하는 나, 서로의 니즈가 촥! 맞아떨어진 거다.
내가 많이 한 작업 중 하나가 매장 내 디지털 스크린에 들어가는 콘텐츠 작업이었다. 영상 + 텍스트 애니메이션이나 아이콘 + 텍스트 애니메이션 등 다양했다. 때로는 다른 나라 매장 스크린 작업을 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일 뮌헨에 새로 여는 매장 스크린 작업이었다. 이 매장은 독특하게 스크린을 친환경 스크린으로 만들었다. 앞면은 흰색, 뒷면은 검은색인 원판이 수백개로 만들어진 스크린으로, 앞뒤가 뒤집히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보통 초당 25-30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스크린은 초당 15프레임만 필요했다. 흑백으로만 구성하고, 보통 애니메이션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걸 감안한 스타일을 적용해야 했다. 내 상사들은 그저 'Be creative!'라고 방향만 던져줬다. 그 덕에 신나게 나 스스로 이런저런 연구를 해서 만들었다. 보통 애니메이션 용량은 최소 50mb~1gb가 넘는데 이 영상은 1mb정도밖에 안 됐다. 해상도는 170px(보통 1920px) 정도에 15프레임이니 용량이 가벼울 수밖에!
나중에 실제로 매장에 구현된 모습을 봤는데 생각보다도 더 예뻤다. 아래 알록달록한 배쓰밤과 대조적으로 스크린은 흑백으로 이루어지니까 훨씬 조화로워보였다. 매장 기획한 사람이 정말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직접 가서 보진 못했지만 촬영 영상으로만 봐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고효율, 친환경 스크린에 대해서도 알게 된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이외에도 일본 신주쿠 매장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스크린이나 하라주쿠 매장에 동그란 모양 스크린에 들어갈 영상을 작업한 것도 너무 재밌었다. 이것이 글로벌 기업에서 일한 큰 장점이었다. 그들의 자본으로 다양한 실험을 할 때 내가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것. 내가 만든 작업을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으니 보람은 배가 됐다.
매장 스크린에 들어갈 영상뿐만 아니라 SNS에 들어갈 콘텐츠도 많이 만들었다. 비록 러쉬는 2021년 이후로 모든 SNS를 닫았지만(유튜브 제외) 그전까지만 해도 인스타그램에 들어갈 콘텐츠를 활발하게 만들곤 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새 제품이 나오면 그와 관련된 광고나 이벤트, 명상 등을 홍보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리드, 스토리, 릴스 등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뿌듯했던 작업은 GIF 스티커를 만든 일이었다. 2018년 7월쯤, 한창 인스타 스토리가 생기고 그 안에 움직이는 스티커를 넣는 게 유행인 때였다. 인스타 스토리를 활발하게 하던 나로서 회사에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다.
'러쉬 제품으로 인스타그램 스티커를 만드는 게 어떨까요?'
그때 가장 유명한 배쓰밤인 인터갈락틱을 캐릭터화해서 처음으로 스티커를 만들었다. 근데 그게 회사 내에서 대박이 났다. 영국 러쉬는 신기하게 동료들끼리 거의 전염 수준으로 인스타그램 친구다. 그 덕에 나도 인스타에서 한 120명 정도는 러쉬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다. 내가 내 스토리에 스티커를 만들었다고 올리자 러쉬 집단에서 파도타기처럼 그 스티커를 우수수 써준 것이다. 감~동� 솔직히 절대평가로 보면 내가 만든 스타일이 완성도가 높지 않았지만 영국 동료들은 그저 잘했다고 해주는게 참 감사했다. 그 이후로 2년동안 회사에서는 뭐만 하면 계속 GIF 스티커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중에는 스타일이 중구난방일 정도로 정말 다양한 스티커를 만들었다.
유튜브 작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How to Use' 시리즈였다. 러쉬 제품은 포장지를 없애기 위해 실험적인 제품을 많이 만들다보니 이 제품이 무슨 용도인지,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유튜브로 러쉬 제품 사용법 영상 - 'How to Use'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라니까 그냥 하는 수동적인 태도였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자주, 계속 만들다보니까 나도 점점 주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보통 혼자 작업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이 작업은 의뢰한 부서, 촬영팀, 편집팀과 함께 일하니까 아무래도 의사소통을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가장 마지막 주자였다.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을 바탕으로 그래픽과 음악을 얹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미리 사전제작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텍스트가 들어갈 공간이 부족한 경우, 모델이 있는 부분을 옆으로 옮겨야 한다고 치자. 편집영상을 오른쪽으로 밀었더니 화면 왼쪽에 빈 공간이 생기는 거. 그러면 편집영상을 더 확대하거나, 왼쪽 빈공간을 배경색에 맞춰 다시 색을 채워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내가 작업하는 게 더 복잡해져서 결국 스토리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런 팀작업은 이전 러쉬에서 해본적이 없어서 아예 체계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하다보니까 스토리보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나도 사전 미팅에 꼭 참여하고, 설명서를 내게 보내달라고 했다. 스토리보드에 설명서를 토대로 큰 틀을 짜고 촬영방식은 어떻게 할지, 그래픽은 어떻게 들어갈지 등을 써놓으니까 촬영팀과 훨씬 작업하기 수월해졌다. 결국엔 스토리보드 템플릿까지 만들었다. 화면 비율도 정사각형, 가로형, 세로형 등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촬영장소에 가서 직접 감독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는 유튜브 썸네일과 엔딩카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목이나 썸네일 넣을 공간을 생각해서 촬영하도록 했다. 5년동안 약 40개 이상의 영상을 만들었다. 만드는 동안 팀원간 갈등도 있었고 시간에 쫓겨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팀워크와 주체성을 배운 정말 고마운 프로젝트였다.
더 자세한 작업과정이 궁금하다면 이 페이지 참고!
https://soosookim.com/#/lush-how-to-use/
이렇게 러쉬의 SNS 황금기 시절 그 중심에서 여러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SNS기능이 한창 발달 중이었기 때문에 나도 작업을 해나가면서 배워나간게 참 많았다. 처음에 SNS 담당자가 콘텐츠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화면 비율로 요구했을 때 반감을 표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걔네 말이 맞았다. ㅎㅎ
그때 러쉬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상당히 많은 팔로워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만든 작업은 바로 반응이 왔. 조회수, 댓글, 좋아요가 많은 것을 볼 때 기분이 참 짜릿했었다. 하지만 러쉬가 SNS를 닫은 이후로 러쉬에서의 내 비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5년이란 시간동안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참 다양한 일을 했다. SNS를 닫은 이후에는 러쉬 자체 홈페이지에 넣을 스토리나 웹 아이콘 등을 많이 만들었다. 그 외 QR코드 디자인, NFT에 영상 최적화하기, 굿즈 디자인에서 제품 모델까지 참 풍부했다. 쓰다보니 글이 또 길어졌다 아이쿠! 그래도 궁금할 것 같아서 최대한 자세히 풀어봤다. 오늘 글 유익했기를 바란다.
다음 글에서는 러쉬에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퇴사 이유)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다.
위 글은 제가 정기적으로 보내고 있는 뉴스레터 <그래서 영국이 어땠냐면>의 원문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영국과의 문화차이 관련 글을 더 읽고 싶으시다면 뉴스레터 <그래서 영국이 어땠냐면>을 구독해보세요!
혹시 런던에 살 예정인가요?
장은 어디서 보고, 생활용품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집은 또 어떻게 구하지?
막막하시죠 ㅜㅜ 매번 검색하는 것도 피곤하실 텐데요~!
제가 최근 야심차게 준비한 <런던 생생정보통>을 공개합니다!
집구하기, 런던의 대중교통, 핸드폰 개통부터 구직사이트, 로컬들이 잘 아는 미술관, 작업하기 좋은 카페 등 7년 런던 현지인으로서 깨알 정보를 정성껏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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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