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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도 드세요.

by 수수

나는 거절을 잘 못하며 살아왔다. 거절하지 않는 것이 착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니,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리라. 나에게 누군가가 부탁했을 때 거절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두려웠으리라. 남편, 형제, 자녀, 직장 동료들, 나와 관계된 사람 누구든지 다 그랬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거절을 했다. 지인이 부탁을 해왔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면서 내 마음이 힘들어졌다. 내가 거절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이 나의 부탁을 거절할 때 충분히 이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지인이 나에게 부탁한 것을 거절했다.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그렇게 거절하고 나니 내 마음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나쁜 짓 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처럼 여겨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나에게 부탁한 지인과 내가 함께 있는 카톡방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거절한 것을 알고 수군거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동안 남편의 요구가 나에게 부당하다고 여겨질 때 제대로 거절할 줄 몰랐던 나다. 거절하고 나서 남편의 반응이 두려워 피해 있거나 내 표정이 굳어버리곤 했다.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편하지 않고 마치 죄인인 듯한 움츠러든 목소리로 반응하곤 했다. 직장인 학교 일도 그랬다. 내가 거절하면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학교 일이 잘되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이 점점 나에게 쌓여 왔다.

이번,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고서도 죄지은 자처럼 주눅이 든 목소리와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는 나를 파악했다. 왜 그럴까? 어린 시절 성장기의 가정환경 영향이리라.

그래서, 나는 거절하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요즘 며칠 동안 하나하나 짚어가며 스스로를 교육했다.

첫째, 상대방에게 거절하는 이유를 당당하고도 부드럽게 알려주자.

둘째, 거절하고도 그 거절한 일과 상관없이 편한 목소리로 대화하자.

셋째, 거절당한 상대방의 상황이 안타깝지만, 그것을 내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

넷째,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다독여 주자.

다섯째,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했을 때, 거절당해도 그럴 수 있음을 편하게 생각하자.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고 나서 2주 동안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다독이며 성장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토요일 오후 2시에 서귀포예술의 전당에서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2023 호기심 소녀 엘리스의 상상 여행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호기심 많은 엘리스가 모험을 찾아다니는 동안 만나는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을 빼앗길 것 같은 상황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킨다. 나는 나이가 60살이다. 그런데도 어린 엘리스처럼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켜왔다. 이제는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도록 대화의 기술을 키워가기로 했다. 정중하게 거절하면서도 당당하고 여유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과 목소리가 되도록. 호기심 소녀 엘리스가 모험을 떠났다 안전하게 돌아온 것처럼, 나는 거절이라는 모험을 하고 무사히 내 마음을 지켰다.


공연을 보고 나서 외도에 있는 스타벅스 카페로 오는 길을 해안로로 택했다. 스타벅스를 목적지로 하는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다. 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발그스름한 색을 띤 석양도 보았다. 배가 고파 저녁을 먹으러 길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서귀포에 있는 '큰솔가'라는 일반 음식점이다. 김치찌개랑 계란찜, 밥, 밑반찬을 며칠 동안 굶은 사람이 먹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마당 주차장에서 잠깐 걷고 있었다.

"선생님, 귤도 드세요. 박스에 있는 귤 드시고 가지고 가셔도 되세요."라며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았다. 식당 주인분인가 보다. 걸어서 식당으로 들어가시며 밝은 표정을 짓고는 마당 가 박스에 담겨있는 귤을 가리킨다. 혼자 밥을 먹으니 외로운 마음도 있었는데, 주인분의 행동이 그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선물이 되어 주었다. 나는 작은 귤 몇 개를, 마당을 걸으며 먹고, 두 손 가득 담아 차에 탔다. 작은 귤이 탱글탱글하고도 상큼한 맛이었다.

'괜찮아, 잘했어. 거절해도 돼.' 입안에서 귤이 말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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