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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Jan 30. 2023

게임 LQA 테스터

어쩌다 이런 일

영어권 사회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어 번역과 통역을 하게 된다. 부모님 대신해 사무적 편지를 쓰고 통화를 하거나, 같이 강의를 듣는 다른 한국 분들이 강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시면 설명을 해드리고 에세이 검토를 해드리기도 하며 말이다.


5년 정도 돈을 받는 번역과 통역을 하며 생활한 적이 있는데, 일감 따올 줄도 모르고 자신감도 없던 시절이라 방에 콕 박혀서도 할 수 있고 필요할 때만 나가면 되는 이 일은 나이는 어른인데 마음이 그에 부응하지 못하던 그 시절 내게 딱 맞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딱 맞는다=딱 좋다는 아니다.)


그 당시 했던 일을 돌아보면 다양하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영국 모 방송국에서 온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북한 핵 사태에 대해 설명하는 새터민 분 인터뷰를 통역하기도 했고, 좋은 번역가님이 재미로 옮긴 글을 좋게 봐주셔서 소설 번역을 두어 권 해보기도 했고, 모 증권회사의 비즈니스 엑스포에서 한국 모 기업의 순차 통역을 하거나 한국 모 신문 기자분들과 영국 모 방송국 관계자분의 인터뷰 통역도 해보는 등... 쓰고 보니 통역 프로젝트만 다양했고 번역 프로젝트는 소설 번역 빼고는 비슷비슷했던 것도 같다.


물론 일감이 줄줄이 이어졌던 건 아니다. 위에 썼듯이 일감 따올 줄도 모르고 자신감도 없었으니까.


2000년대 후반 첫 직장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11가지 다른 직함을 달아봤는데, 프리랜서로 한 통번역일도 아니고 한인 기업/한인 대상인 일이 아니면서 한국어와 영어 능력이 구인광고 필수항목이었던 건 게임 LQA 테스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게임 LQA 테스터는 Localisation Quality Assurance를 하는 일이다. QA 테스터가 프로그램을 돌려보며 버그를 잡듯, 게임 LQA 테스터는 지정된 언어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현지화가 잘됐는지 인터페이스를 샅샅이 확인하고 언어 관련 버그를 (오역과 인터페이스상 오류) 바로 잡는다.

게임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게임에 들어갈 글이 어느 정도 확정되면 번역 회사에서 초벌 번역을 하고, 게임 QA를 할 때 문자열에 이를 씌워서 다른 언어판을 만든 후 LQA에 들어가는 식인 것 같다. 게임이 다 개발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번역을 하면 너무 오래 걸리고 전 세계 동시 발매를 할 수 없으니까.


LQA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게, 1) 초벌 번역은 아무런 레퍼런스 없이 문자열만 받아 직역한 거라 맥락에 어긋나거나 어색할 수 있고 (그에 더해 게임 개발 중 문자열이 바뀌거나 없어지기도 하고), 2) 문자열을 넣어봤을 때 게임 화면상 잘리거나 레이아웃이 맞지 않을 수 있으며 (특히 키패드 설명 화면에 들어가는 글처럼 그림에 붙은 설명문 같은 경우는 으레 글을 알맞게 바꾸거나 줄 바꿈을 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3) LQA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게임 개발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팀장이 이거 저거가 바뀌었으니 새로 생긴 문자열 번역하고 관련 문자열 수정해 달라고 하면 이것부터 먼저 해서 개발팀에 보내야 다음 패치에 적용이 된다. 그렇다, 다음 패치... 한창 LQA를 다 해놔도 다음 패치가 나오면 LQA 테스터는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플레이하며 죄 확인을 해야 한다.


어떤 게임은 멀티 콘솔 발매라 플스판, 엑박판, PC판도 각각 여러 번 플레이해야 하기도 하고, 콘솔이 바뀌면 또 플레이해야 할 때도 있다.  (PS3으로 잘 내놨더니 PS4 판이 나온다고 해서 몇 달 후에 또 플레이한 게임도 있었다.) (그 게임은 지금 해보라고 줘도 몸이 퍼펙트로 깨는 법을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무조건 몸으로 부딪치며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된 시점부터는 개발자들이 게임에 크랙을 심어놓아 특정 분기점으로 곧장 갈 수도 있고 잠겨있는 장비나 아이템 같은 것도 단번에 다 해금할 수 있다. (하지만 크랙을 쓰면 게임이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고 크랙으로 인한 버그도 생기는 등 평범하게 플레이하는 게 아니니 결국 자기 힘으로 한 번은 다 클리어해 줘야...)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이 철저한, 속세와 단절된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점이 좀 색다르다. 보안의 철저함이 얼마 정도냐면, 현관에 라커룸이 있어서 폰을 라커에 넣어두고 가야 하고, 아직 시판되지 않는 개발 중인 게임을 다루는 것이니 만큼 전자기기는 절대로 반입할 수 없다. 외부인 출입도 물론 제한되어 있다.

내가 일하던 사무실은 게임 LQA부서가 창문이 없는 지하실 1층, 그리고 지상 1층 사무실을 썼는데 지상 1층도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늘 닫힌 채로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어 휴식 시간에 잠깐 나가지 않으면 계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웹서핑도 제약이 많아서, 구글과 위키피디아, 해당 언어 사전 등 필요한 웹사이트 외에는 모두 막혀 있었다. (차세대 콘솔을 시판되기 전 다루기도 하니 이래저래 조심해야 한다.)

책 읽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얘기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확인해야 할 게 많으니 한 게임 당 두세 팀이 나눠서 또는 돌아가며 LQA를 하기도 하고, 멀티플레이어 모드도 플레이하며 체크해야 하니 언어판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팀원이 40명을 웃돌기도 한다. (나 같은 게임 뉴비한테는 게임 잘하는 한국인 동료들이 구원이었던 적이 적잖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 친해져 놀기 딱 좋은 환경이다.


요새는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출근해서 돈만 받는 '벤치 신세'로 서너 주 정도 월급 루팡으로 지낸 적도 있었다. 아마 내가 일한 곳이 하청 업체여서 그런 거겠지만 (스퀘어 에닉스나 소니처럼 사내 LQA 팀이 있는 곳도 많지만, LQA 하청 업체도 많다), 간단히 말해서 올 시간이 됐는데 안 오는 게임을 기다리며 대기를 타는 거다. 그럴 때는 책 챙겨가서 자리를 지키며 독서 시간을 가졌다.

위에 여러 번 썼지만 같이 있는 사람들하고 친해지기 딱 좋다.




기간이 촉박하면 살짝 스트레스받을 때도 있지만 일개 팀원이 지는 부담은 그리 크지 않고 계약직이기에 야근은 전무, 게다가 다양한 유럽인과 만나기 좋은지라 짭짤한 알바로 하기 괜찮은 일이었다. 여기서 1년 반 정도를 지내다 보니 프리랜서 생활을 그만두고 회사를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누가 날 뽑아줄까? 내 능력이 영국 사회에서 먹힐까?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과 지내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낀 게 컸던 것 같다. 일을 금방 배우고 일처리가 빠르다는 평에 자신감도 좀 생겼고. 이래저래 도전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영국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싶어졌다.  




여담 1. 슈퍼패미콤이나 PC게임 폰게임만 하는 게이머라고 하기 민망한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PC웹게임 LQA 후 콘솔 프로젝트로 전향하면서 콘솔에 익숙해지라고 게임하는 시간을 할당받았다.


여담 2. 내가 3D 멀미를 심하게 한다는 걸 재확인하기도 했다. 익숙지 않은 콘솔 게임으로 카메라 시점을 빙빙 돌리다 현기증이 심해져서 일하다 말고 휴게실 소파에 드러누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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