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은 결국 나 자신도 행복하게 만든다
올해 말 띠 해라 그런가. 예능 프로그램도 코스피 6000을 넘긴 주식 장 처럼 도파민 과열 시대에 절로 숨이 차는 요즘이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자극 콘텐츠에 피로도가 높아지던 겨울, 예능 프로그램에도 오랜만에 봄이 왔다.
제목부터 무해하고 순수한 느낌이 나는 '마니또 클럽'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은 결국 나 자신도 행복하게 만든다.‘ 는 따뜻한 메시지를 담은 프로를 보고 오랜만에 무한도전 쉼표 특집, 의좋은 형제 편까지 다시 찾아봤다.
요즘처럼 효율이 중요한 시대에도 사람은 여전히 비효율에 감동하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낯선 사람의 작은 호의에는 쉽게 감동하고 표현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익숙한 호의에는 왜 그렇게 무뎌지는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엔 괜스레 용기와 명분이 필요해진다. 평소라면 쑥스러워 삼켰을 진심을 마니또라는 익명 뒤에 숨어 서로에게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적당한 매너 속 연약한 속내를 드러냈을 때 연결되는 진짜 연대감 같은 그런거)
직접 가서 선물을 고르고, 발품을 팔고, 포장지를 고르고, 편지를 부치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손가락 하나로 손쉽게 해결되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애써서 기억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생일을 쉽게 알게 되고 챙길 수 있는 시대.
분명 더 빠르게 축하하고 더 쉽게 선물을 보낼 수 있음에도 오히려 '어떻게 알았어?' 의 감동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의 부채감이 늘어나는 것 같은 요즘이다.
기프티콘이 빠지면 왠지 허전해 보이는 축하 인사와, '내게 선물 준 친구'의 친절한 표시 기능은 오히려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감까지 생겨 부담으로 느껴지곤 한다.
내가 애써서 기억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설레는 그 시간이 요즘 너무 짧다. 모든 대상을 놓치지 않고 챙기기란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고, 몇 초면 성의를 표현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 살면서 모든 건 핑계가 되기도 한다. 행여나 상대에게 번거로운 주고받음의 부담을 주게 되는 건 아닌지 머뭇거리게 되기도 하는 요즘의 생일.
물론 안 보이게 하는 기능도 생겨났지만 한편으론 그렇게까지 가릴 정도로 피로도가 높아진 생일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씁쓸하기도..
시간이 금이고, 효율이 중요한 시대에서 '관계에도 효율을 추구하는 요즘, 우리는 정말 더 축하받고 있을까?'
‘편리함이 오히려 감동도 줄인 건 아닐까?’ 싶은 시기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상대를 관찰하고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의 느린 취지가 반갑게 다가왔다.
이 프로그램은 가격대에 맞는 선물을 교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누군가를 오래 관찰해야 가능한 친절을 베풀며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향한 증여의 마음을 담는다.
내가 이 구역의 짱이야! 처럼 치열하게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내야 하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시선을 옮기니 어딘지 모르게 순환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내 마음이 오롯이 주인공이 된달까.
이 프로를 보면 누군가를 위한 선의와 선물을 제공함에 있어서도 각자의 해석이 다양하다. 추성훈은 물건 대신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과 '추억'을 제공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도 하고, 덱스는 상대를 떠올리며 고민한 '과정' 자체의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커피 한 잔의 선물에도 노홍철은 이수지의 평소 입맛을 파악해서 'ㅇㅇ카페에서 농축우유를 사용한 디카페인 라떼'를 선물한다. 기프티콘의 세상에서는 가장 무난한 스타벅스 교환권을 선물하며 성의로 대신하는데, 굳이 강남에서 합정을 다시 찾아가는 수고스러움을 더하며 정성을 쏟는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상대를 관찰하고, 취향을 고민하고, 타이밍을 재고, 비효율의 순간들이 모여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효율의 영역에서는 결과와 가성비가 중요한데, 관계의 영역에서는 상대가 나를 위해 낭비한 시간이 곧 그 사람의 마음 크기를 증명하는 것만 같다.
느려서 좋고, 비효율적이라 좋고, 낭비될수록 더 빛나는 것들이 세상에 있긴 하네.
관계의 수고스러움이 사라진 시대에서 어느 순간 SNS 알림에 등 떠밀려 보내는 정형화된 선물 대신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살피는 마니또가 되어보자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취지인가 보다.
상대의 반응을 엿듣고 뿌듯해하고, 주는 과정에서 설레어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 같다. 보상 없는 노동, 수고스럽지만 굳이 하는 마음, 선물에서 느껴지는 상대로부터 관찰받았다는 마음까지.
시간도 줄었고, 노력도 줄었고, 불편함도 사라진 세상에서 편리해지는 만큼 마음만큼은 디지털화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노홍철이 이수지에게 그림책을 선물하는 장면을 보고, 나도 동료에게 그림책을 선물 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른이 돼서 그림책을 선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참 묘하다. 분명 글자보다 여백이 많은데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진심 어린 메세지를 읽는 기분. 그림책 선물이라니.. 나이대에 어울리는 선물만 생각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를 생각하며 고른 그림책이라 하니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에 꾹꾹 눌러 읽었다. 그 뭐랄까 나이 들수록 내 예상과 다르게 편견이 기분 좋게 깨질 때만큼 짜릿한 순간이 없다.
선물 받은 그림책 제목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이 책은 화려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간 자리에도 삶의 소중한 것들은 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라 그 열기가 식은 다음 날의 안부를 묻는 책이라 더 좋았다. 하루뿐인 특별한 날에 그치지 않고 남은 나의 평범한 일상까지 응원받는 기분!
앞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이 올 때면 이 친구가 가장 먼저 생각나겠지? 마음은 동화처럼 살고, 일터에서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라 그 간극이 주는 무게감이 더 좋았다.
변화하는 예능의 흐름처럼 사람은 하나의 방식에 오래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늘 변화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으니 마니또 클럽과 같은 아무리 좋은 착한 예능도 너무 많아지면 사람들은 다시 자극적인 매운맛을 그리워하겠지?
안정을 원하면서도 변화에 목말라하고 힐링과 위로를 원하다가도 성취가 결핍될 때는 서바이벌에 몰입하기도 하듯 결국엔 관계도, 콘텐츠도, 관심도, 사람도, 경기도 모든 게 결국 순환하기도 또 순환되기도 하는 것 같다.
나조차도 1분 안에 모든 게 끝나는 숏폼 세상에 질려서인지 깊이에 대한 허기가 생겨서 브런치를 자주 찾게 되는 요즘이다.
뜬구름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효율과 생산성에 강박이 있는 사회에서 낭비의 재발견을 다루는 콘텐츠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이 순위에 없는 것 같고, 취미가 없는 게 아니라 취미를 발견할 시간의 낭비를 허락받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룬게 많아도 놀 줄 모른다는 전현무와 그 대척점에 있는 노홍철이 엠씨로 있으면 대비되는 해석을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서로 '난 저렇게는 못살아' 라고 외친다. 일하지 말고 놀아라가 아니라, 즐길 수 없는데 즐겨라 같은 말 말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메세지가 담겨 있으면 좋겠다. 근데 한편으론 전현무와 노홍철의 차이가 아니라 직업군 마다 생존 조건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직장인, 자영업자, 사업가, 프리랜서, 그리고 가정주부까지. 자기 위치나 직업별로 어떤 마인드가 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어떤 마인드가 성장을 위해 필요한지 보여주는 그림 뭐 그런거 없을까?
전현무처럼 사회적 기준에 맞춰 성실히 성과를 내는 삶도 있고, 노홍철처럼 나만의 색깔을 지키며 파격적으로 사는 삶도 있다. 전현무의 속도에 노홍철의 방향을 더하는 일과 낭비의 황금 비율 뭐 이런거 없나
지난주에 유독 하루만 날씨가 좋길래 해방촌에 있는 홍철책빵을 다녀왔다. 이제는 노홍철이라는 사람 자체가 브랜드가 된 것 같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거의 다인 세상에서 재미를 쫓다가 돈이 따라붙는 삶을 사는 사람은 노홍철이 유일한 것 같다. 예전에는 재밌어서 실행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요즘의 행보를 보면 실행하며 재미를 찾는 사람 같다. 관심이 확장되는 만큼 몰랐던 재미도 같이 확장되는 듯 하다. 예상치 못했던 기회를 발견하며 업으로 연결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나까지 대리만족하게 되는 사람.
제도권 밖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유쾌하게 증명해 내는 사람의 공간에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왔을 뿐인데 마치 긍정 기운을 풀파워로 전달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게 돈이 돼? 그게 성적에 도움이 돼? 결국에 생산적으로 연결되어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일단 몰입해서 하면 가장 가치 있는 낭비로 이어진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효율과 생산성에 중독된 사회에서 돈이 안 되는 일은 다 시간 낭비야! 의 단단한 틀을 깨주는 듯 했다. 모든 도전이 성공하진 않겠지만 도전 없이 성공할 수도 없으니 한 번쯤 노홍철의 마인드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2026년에 내가 할 가치 있는 낭비는 뭘로 세우면 좋을까? 나에게는 글인 거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