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2(수비리)

장미의 혹은 가시나무의 계곡

by 호변나그네

D+2 (10/10 Friday) Roncesvalles - Zubiri, 22km

아침,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울려 퍼지는 가톨릭 성가 소리에 눈을 뜨다. 이곳에서 유일한 대형 공립 숙소라 생장에서 보지 못했던 많은 순례자들이 새로 합류한다. 우리 섹션에서는 영국 할아버지, 이태리, 불가리아 청년들이 이곳에서부터 순례 여정을 시작한다고 한다. 피레네 산맥의 험한 첫 구간을 피해 여기 론세스바예스부터 걷는 것도 좋은 선택처럼 보였다. 실제로 순례자 여권(Credential)을 발급해 주는 Camino 오피스가 알베르게 사무실 옆에 있어, 이곳에서의 출발이 한결 수월하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는 장미의 계곡, 그리고 바스크어로는 가시나무의 계곡(Orreaga = Valley of thorns)을 뜻한다고 한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그의 조카 롤랑이 사라센 군과 맞섰던 전투를 기린 서사시 “롤랑의 노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극악한 몸상태라 시내를 둘러볼 생각을 못한다.

7시 반 알베르게에서 출발,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숲길을 걷다 보니, 8시 반쯤 되어 서서히 날이 밝았다. 어제 안갯속에서 처럼 길을 잃지 않도록 오늘은 앞사람 배낭만 바라보며 묵묵히 따라간다. 구름에 달 가듯 순례자들은 듬성듬성 대열을 이루어 경쾌하게 걷는다. 신기하게도 꽤 연배가 많은 백발의 노인분들도 경공술을 쓰는 듯 잠깐 사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또 다른 후행이 내 앞에 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수비리(Zubiri), 22km.


걷고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숲길 자갈길 흙길을 고통 속에 걸어간다. 어제 무리하게 10시간을 넘게 걸은 덕분인지 발바닥 발가락 종아리 무릎 허리 어깨 온 세포가 신음을 한다. 특히 알이 배긴 종아리와 배낭의 무게에 짓눌린 어깨는 아예 통곡을 한다. 1km 도 못 가서 쉬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또 멈춘다. 안면이 있는 이들이 지나가다가 괜찮냐고 다들 멈춰 묻는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내가 지고 걸어가야 할 인생의 무게인걸.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 만근이다. 오늘 정말 내가 수비리까지 갈 수 있을까를 수십 번을 되뇌었다. 고뇌 속에서도 그냥 이대로 걷는다. 앞만 보고 걷다 보면 언젠가는 이 길이 끝나겠지. 약 15km 남은 지점부터 몸이 심상치 않더니, 발을 쓸며 몇 걸음 걷고 쉬기를 반복. 마침내 10,9,8,7…. 4km – 아, 이 마지막 4km가 극악한 고난의 행군이 되었다.

마침내 수비리 다리를 건너 보이는 첫 알베르게에 몸을 던지듯 체크인. 공립 (Municipal)인 줄 알았는데 사립, 18유로에 조식 포함이니 가성비 좋은 편이다. 수비리는 인구 400명 남짓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기진맥진 침대에 누우니 옆자리 순례자 동료들이 근육통 연고를 건네며 걱정해 준다. 부디 내일은 좀 나아지기를! 두어 시간 죽은 듯 누워 있다가 저녁 무렵에야 조금 기력을 회복하여 식당으로 향한다.

순례자 메뉴 (Menu del Peregrino) 주문. 샐러드, 그리고 돼지갈비, 디저트 케이크에 와인까지 곁들여 15유로. 훌륭하다. “이러니 살이 빠질 새가 없다”라고 옆자리 영국 아지매 너스레. 우리 테이블에는 스위스 부부, 홀랜드 아줌마. 영국인 부부이 함께 했고 저마다의 경험담으로 수다가 꽃을 피웠다. 책을 좋아한다는 홀랜드 아지매가 무라카미 하루키 얘기를 꺼내서 한동안 감상을 주고받음. 동양인이라고 무라카미 얘기를 꺼낸 것 같은데 무라카미는 동양보다는 서양 정서가 어쩌면 더 어울릴 수도. 와인 두 잔, 좀 긴 수다에 알딸딸한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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