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평안하고 이렇게 고요하고 그래서 이렇게 무료한 걸음들
D+18 (10/26 Sun) Carrión de los Condes -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27 km - 이제 반 왔다!
오늘부로 썸머타임이 해제되었다. 시간이 훨씬 현실적인 감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6시 50분 출발. 아직 어두운 아침이지만 곧 밝아지리라.
카리온은 참 매력이 있는 마을이다. 인구 2,200여명 남짓한 작은 마을인데도 사람의 향기가 있고 성당의 영성이 골목 골목에 배어 있는 듯하다. 간밤 미사의 여운도 함께 남아 있다. 새벽길을 나서며 괜스레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다음 마을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 까지 17.2km, 인가 하나 없는 계명구폐절 (鷄鳴狗吠絶 ;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끊긴) 의 텅빈 공간이다.
7시 44분 일출, 밝은해가 삼라만상을 비추니 아! 눈이 부신, 가슴 시린 가을날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추수가 끝난 텅빈 들판, 바람마저 멎은 고요, 따뜻한 햇살. 오직 하늘과 들판, 그리고 천상천하의 정적만이 담겨 있다.
길은 17km 넘게 굽이 한번 없는 직선 도로가 펼쳐진다. 이렇게 평안하고, 이렇게 고요하고, 그래서 이렇게 무료한 걸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껏 걸어본 모든 길 중 가장 평탄하고 고요한 길을 꼽으라면, 단연 메세타의 이 길일 것이다. Camino 를 걸음에 매일 매일 특별한 감동이 있다.
조용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은 “잃어버린 시간“ 을 찾아서 의 연상 작용으로 이어진다. 확실히 기뻤던 기억들 보단 가슴 아팠던 기억들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듯. 옛 기억을 꺼내어 보다 보면 가슴이 시리다.
오래전에 천택이가 벽돌보다 두꺼운 이 마르셀 프루스트 책을 항공우편으로 보내주었었다. 책값보다 배송비가 몇배는 더 들었으리라. 총 4,000page 가 넘는 대작. 100여 페이지 만에 그 지난한 묘사에 지쳐 읽기를 중단한 책이다. 누구든 “시간” 속에서 풍화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주인공의 의식이 스완네 집으로 어디로 헤매듯이 우리 각자의 삶 또한 기억과 후회의 복도를 끝없이 왕복하며 매일 수천 페이지의 대서사를 쓰고 있는 것일게다. 다만 너무 가슴아픈 회고는 그만! 기억 속에서 점차 되살아나는 내 삶의 온기를 느껴보길 원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의식의 흐름 그 근원을 찾아서 이 책을 다시 집어들고 완독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오전 11시, 칼사디야 도착. 중간에 한 번 멈춰 재킷을 벗고 물 한 모금 마신 것 외에는 쉬지 않고 네 시간 만에 17km를 내달린 셈이다. 아, 평온과 고요의 길이여! 마을 어귀 바(Bar)에서 차 한 잔. 꿀맛이다.
다음 마을 레디고스(Ledigos) 까지 6km, 자갈길이다. 이젠 걷는게 숙달이 된듯. 하늘 몇번 올려보고 벌판 보고 지평선을 보다 보면 어느새 다음 마을 도착이다. 1시경 레디고스 도착. 마을 성당에 들러 저만치 발치에서 인사, 성당 경사길을 힘들게 올라가던 노부부가 손을 흔들어 준다.
쉬지 않고 2.8km를 더 걷는다. 길가에서 산티아고 400km 표지석을 보았다. 이제 절반을 지난 셈이다. 그리고 오후 1시 40분,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도착. 인구 100명의 한적한 소읍이다. 오늘 총 27km 걸었다. 레온 (Leon) 까지 이제 3일 길이다. 레온에 도착하면 하루쯤 따뜻한 욕조 (Bath tub) 에 몸을 푹 담구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