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사마리탄
D+17 (10/25 Sat) Fromista - Carrión de los Condes, 21 km
아침 7시 반 출발, 한 시간은 더 가야 어슴푸레 날이 밝아진다. 헤드랜턴으로 앞발치만 비추고 천천히 걷는다. 새벽 미명의 걸음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걸어가면서 점차 빛이 어둠을 깨우는 모습은 볼 때마다 황홀한 감동 그 자체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웅장한 서주 해돋이 Sonnenaufgang 가 내 머리속에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다 - 까만 어둠에서 차고 푸르른 색으로 다시 진회색 연분홍 진분홍 빛깔로 하늘이 마침내 황금색 빛으로 화안하게 밝아오는 장엄한 광경은 보고 또 보고 싶기만 하다.
이 구간은 프롬미스타 (Fromista)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rión de los Condes)으로 가는 국도와 나란히 Camino 길이 뻗어있다. 길은 평탄 그 자체다. 마을도 4개를 지난다고 하니 메세타 구간이 아닌 여늬 Camino 길 같다
3.5Km 순조롭게 걸어 8시 20분 첫 마을 뽀블라시온(Población de Campos)을 지난다. 아직 날은 어둡고 이 작은 마을은 밤보다 더 깊은 정적에 잠겨있다. 어슴푸레한 박명 속에서 앞서가던 아줌마 한분이 손짓으로 아는 체를 한다.
“우리 어제 같이 저녁 먹었잖아!” 버지니아주에서 왔다는 미국 아줌마다. ”네가 나가고 나서 좀 있다 그 일본애가 갑자기 쓰러져서 911이 오고 난리가 아니었어. 그 애 괜찮아야 할 텐데…” 난 어제 저녁 자리가 식사가 끝나고도 마냥 길어지고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왔는데 그 이후 그런 사달이 난 모양이다
사또꼬 (聡子), 깡마른 체격에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12Kg가 넘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도 항상 나를 앞서 나가던 강골 처녀.. 우짜다 그런 일이! 우리가 길에서 만나고 또 길에서 헤어지는 인생이지만 이처럼 길이 아닌 ‘Incident’로 여정을 멈추게 되는 일은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아줌마도 앰뷸런스 이후는 모른다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부디 빨리 쾌차해 다시 카미노로 돌아오기를!
두 번째 마을 레벵가 데 캄뽀스(Revenga de Campos) 사람이 사는 곳인지조차 모를 만큼 조용하다. 그대로 통과. 세 번째 마을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 9시 50분 도착, 여기까지 9Km를 쉼 없이 왔는데 여전히 마을은 정적 일색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 흐리고 바람도 조금씩 분다. 오후엔 비가 온다고 하니 부지런히 가야지.
네 번째 마을 비야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 11시 도착, 14km를 쉼 없이 온 셈이다. 그런데 제법 규모가 있는 이곳 조차도 활기를 찾아볼 수 없이 정적이 흐른다. 어디 문 연 카페 가게를 찾아볼 수 없다. 장사할 생각이 없는 걸까? 성모 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la Blanca) 성당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오늘의 목적지 카리온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순례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동행중에 사고가 생긴다면 옆에 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어제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의무를 다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 누가복음 10장 33-35절
생면부지의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정말 이처럼 할 수 있었을까? 부끄러움이 몸 전체에 올라왔다. 돌이켜 보면 평범의 그늘에 숨어 평생을 비겁하게만 살아온 것만 같다. 간혹 비겁하지 않았던 날들이 있긴 하였으나 그 후 인생의 변주는 더 큰 후회의 순간으로 그날들을 기억하게끔 한다.
길가에서 한참을 서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소홀했던 의무를 떠올려 본다 - 진실로 바라건대 이 길을 걸으며 내속에 숨어 있는 부끄러움과 비겁이 드러나고 한처럼 뭉쳐있던 후회의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리길 기도한다.
12시 20분 카리온 도착. 오늘의 목적지다. 더 걷고 싶어도 다음 마을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 은 17Km를 더 가야 한다. 메세타 지역의 대표적 텅 빈 구간이다. 오늘 여기서 Stop.
산타마리아 (Santa Maria)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아주 이쁘고 귀엽게 웃는 수녀님이 맞아 준다. 역시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저녁 7시 미사. 이해하지 못하는 스패니쉬 미사이나 전례의 형식 순서는 낯익다. 영성체 하고 돌아서니 왠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했다. 나의 모든 부끄러움을 아실 듯.
그런데 미사 후 성당 앞에서 사또꼬를 다시 만났다. 걱정처럼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모양. 옆에는 네바다 산다는 Tom 아저씨가 있어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 보살피며 왔던 모양이다. 사마리탄은 어디에도 있다. 난 곤경에 처한 이웃에 몇 번이나 사마리탄이 되어 주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