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16(프롬미스타)

메세타의 '인생은 아름다워라(La vita è bella)'

by 호변나그네

D+16 (10/24 Fri) Castrojeriz - Fromista , 25 km

어제 덴마크 청년의 바람 대로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나기로 했다. 아침 7시 반 기상. 그동안은 새벽에 일어나 방 조명도 켜지못하고 어두운 상태에서 짐을 꾸린다고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오늘은 한결 수월하다. 7시 50분 알베르게를 나서다. 아침 기온이 41F=5C 로 나오는데 왠지 춥지를 않다. 본격적 메세타길 이틀째, 가슴 뛰는 첫 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걸음 걸음이 경쾌하기만 하다


마을에서 알토 데 모스텔라레스(Alto de Mostolares Alto, 900m) 까지는 약 2km, 메사(Mesa), 즉 테이블처럼 평평한 고원 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평지에서 약 150m 다소 급한 경사길을 올라가면 평평한 고원지대가 나오고 사방 시야가 갑자기 툭 트인다.


일망무제 (一望無際) 다!

저 아래 들판 한쪽에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마을이 햇살 아래 조용히 빛나고 있다. 너무도 평화롭다. 어제 그토록 거세게 불던 바람도 없고 오전의 여린 햇살, 다스한 온기를 머금은 대기, 그리고 하늘 벌판 고요가 온누리에 가득하다. 평평한 고원지대 (Mesa), 3km 가 넘는 하늘길, 풍경에 생각을 맡기고 천천히 걸었다.

첫번째 마을 이테로 데 라 베가 (Itero de la Vega) 까지 11km, 11시 도착. 최적의 날씨 전혀 힘든줄 도 모르고 아주 흐믓한 기분. 이테로 마을 카페 정원에 앉아 휴식하며 커피 한잔을 마신다. 따뜻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 청명한 대기 그리고 오가며 미소로 인사하는 순례객, 한적한 정원에서 바깥을 내다 보다가 문득


“아 참 편하다! ”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라” (La vita è bella) 의 느낌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 여태 살아 오면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 자족 내려놓음 평강 행복같은 긍정적 감정의 총합같은! 어쩌면 이토록 평범한 이방의 길 위에서 이토록 강렬한 희열의 순간을 맛 볼수 있다니. 문득 시간이 멈춘듯 하고 눈물이 글썽여지는 평강의 감동이 온 몸을 감쌌다.

평생을 유아독존 고독한 투쟁의 삶을 살았던 트로츠키가 고단한 망명 생활 끝자락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라” 라는 말을 유서에 남길수 있었던 것도 아마도 코요아칸에서의 짧은 (어쩌면 찰라의 순간) 행복을 기억해서 였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 고해의 인생을 산다. 영일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날 문득 우연히 마법처럼 따뜻하고 근심 없는 순간의 행복을 한 두번 맞이할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그 단 한 번의 기억을 1년, 10년, 혹은 평생 간직하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힘든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돛으로 삼아 버텨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메세타에서 만난 이 따뜻한 시간, 앞으로 얼마나 길고 험한 Camino 의 날들이 남아 있더라도 오늘의 이 햇살, 산들 바람, 고요 그리고 미소가 어우러진 모든 카미노의 총합적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이테로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 까지 8km, 역시 아무것도 없는 텅빈 구간이다. 따뜻한 들판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걷는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누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밀밭 ’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평화로다!

일망무제 천지에 보이는건 지평선이다. 저멀리 보아디야 마을 성당 종탑이 보인다. 지구는 구체이니 곡률을 감안하면 8km 앞 종탑이 보이는 건 거의 최대치가 된다. 그만큼 일망무제 모든게 지평선에 맞닿아 있다.

평평한 시야, 가도 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지평선에 걸린 두번째 마을 까지 8km - 2시간을 걸어서야 보아디야 (Boadilla del Camino)도착. 여기서 부터 프롬미스타 (Fromista) 까지는 6km, 카스티야 운하(Canal de Castilla) 와 Camino 가 나란히 뻗어있다. 길을 따라 걷는다.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천지간 고요. 참으로 잊지 못할 하루다

오후 3시 경 프롬미스타 (Fromista) 도착. 오늘 알베르게는 꽤나 붐비고 복잡하다. 꽤나 불편한듯 하나 하루 묵는 곳인데 뭘! 이라고 나 자신을 다독인다. 식사는 각자해결 - 저녁에 알베르게에서 추천해준 식당에 가서 앉고 보니 우리 테이블 손님 대부분이 미국 동부에서 온 순례객들이다. 조금 늦게 사토코도 합류했다. 모처럼 떠들썩한 카미노의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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