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꽃밭이 있어
D+15 (10/23 Thu) Hornillos del Camino - Castrojeriz, 21km
밤새 세찬 비 비람소리 들리더니 (야래풍우성 夜來風雨聲) 아침에는 비는 멎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분다. 아침 7시 반 출발, 미명의 걸음은 참 불편키만 하나 날이 밝기를 마냥 기다리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길을 나선다
오르니요스 마을을 지난다. 여긴 마을 인구 60명의 아늑한 시골 동네. 성당을 지나고 골목을 돌아 나오면 바로 Camino 벌판이 펼쳐진다로. 오늘은 또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길’이 지닌 마법에, 따뜻한 희망의 기대가 스며든다.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하면서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나태주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꽃밭이 되기를 바라본다.
역시 메세타의 바람이 거세다. Meseta는 Mesa (테이블)에서 온 말로 평평한 고원지대를 뜻한다. Camino 구간에서는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약 180km에 걸쳐 해발 800~900m의 고원이 이어진다. 하늘과 들판, 바람과 고요함뿐인, 말 그대로 텅 빈 구간이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맞바람 강풍에 몸이 휘청하다. 엊그제 산 비니를 쓰고 그 위에 쟈켓 후드로 얼굴 주위를 꽁꽁 동여매어 눈만 내놓고 땅만 보고 걷는다.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고 여러 번이다. 900m 평평한 고원에 오르니 메세타의 바람이 더욱 매섭다. 맞바람에 평소보다 걷는데 두 배의 공력은 드는 듯하다. 주위에 풍력발전기가 수십 기가 돌아가는 게 보인다.
한 시간여 지나니 어슴프레 날이 밝아온다. 이 지방의 일출시간은 8시 38분, 그러고 보니 서쪽의 산티아고는 일출이 거의 9시다. 스페인은 서유럽표준시 CET (UTC+1)를 쓰지만 정작 국토의 대부분이 영국 런던 (GMT=UTC+0) 보다 서쪽에 치우쳐 있어, 체감상 일출이 최소 한 시간은 늦다. 그래서 Camino의 새벽길은 늘 길고 묘하게 낯설다
바람을 뚫고 10시 넘어 첫 마을 온타나스(Hontanas) 도착, 10km를 한시도 쉬지 않고 (사실은 쉬지 못하고) 냅다 걸어온 셈이다. 오늘은 11km 정도 더 가면 나오는 카스트로헤리스 (Castrojeriz)의 오리온 알베르게 (Orion Albergue)에서 묵는 걸 목표로 전진 중. 어제 인터넷에서 본 건데 카미노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알베르게. 라면과 김밥이 있고 저녁은 비빔밤이 나온단다. 모처럼의 호사에 마음이 설렌다.
온타나스 이후로는 들판길이다. 바람도 한결 잦아들고 따스한 햇살이 내려쬔다. 걷기 참으로 쾌적하다. 콧노래도 부르고 싶어지는 여유가 찾아온다. 힘든 줄도 모르고 넉넉한 보폭으로 들판을 간다. 그렇게 6km를 걸어 산 안톤(San Antón)에 도착 - 14세기 산 안톤 수도원의 유지 (遺址) 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잠시 쉰다. 세상에는 여전히 불행과 가난, 부자유와 아픔이 많은데, 왜 수도원마저 황성옛터 같은 폐허가 되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부터 카스트로헤리스 까지는 눈에 훤히 보이는 3.5km. 한 시간 가까이 더 걷는다. 마을 오른쪽 언덕 위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대성당. 성당을 거쳐 마을로 들어서니 드디어 오리온 알베르게다. 한국인 주인장이 아니 보이는 걸 보면 아마 실 운영은 여기 현지분이 하는 듯하다.
씻고 나서 점심으로 대망의 김밥과 라면. 저녁은 비빔밥과 된장국이다. 숙박객은 레위니옹(Reunion, 인도양 모리셔스 옆, 프랑스령), 스페인, 덴마크, 일본에서 온 이들까지 다섯 명. 저녁을 먹으면서 나온 얘기로 알베르게에서 일부 사람들이 너무 일찍 떠나 불편하더라는. 그래서 내일부터는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추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좋은 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해 본다.
1. 오늘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15일/324km 걸음, 목적지 산티아고 (Santiago) 까지는 453km 남음
2. 다음 대도시 레온 (Leon) 까지는 140km, 표준일정 대로 걷는다면 6일 후인 10/29 수요일 도착
3. 레온 – 산티아고 구간 314km, 14일 거리, 줄곳 걷는다면 11/12-13일경 도착
4. 스페인 서쪽 끝 피스테라 (Fisterra)까지 갈지 말지는 산티아고(Santiago) 도착 후 결정
5. 산티아고에서 1-2일 숙박, 그리고 바르셀로나 이동 및 숙박 감안하면 11/18 귀국 유지 하는 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