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성당 노수녀님의 기도
D+14 (10/22 Wed) Burgos – Hornillos, 24Km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다. 간밤에 잠도 일찍 들고 중간에 깨지도 않아 숙면을 취한 듯하다. 한음장 (寒陰掌) 장풍을 맞은 듯 매일밤 시리고 아프던 발바닥도 별다른 느낌 없이 평온하다.
일어난 김에 일찍 길을 떠나 메세타의 햇살을 피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6시쯤 넘어 행장을 챙기고 1층 공용 공간으로 내려갔다가 깜짝 놀랐다. 깜깜한 새벽 알베르게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어제 봤던 한국 순례객들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
산티아고 완주하는 순례객 통계 숫자로 보면 한국인 비중은 1.4% (2025년 중 산티아고 등록 순례객 53만 명 중 약 7,500명),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중간구간 단기 순례객을 모수에 더하면 실제 Camino 선상에서는 1% 에 한참 미치지 못할 한국인 비중이 “So Many & Many” 의 인상을 주는 마법이 이런 데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확연히 눈에 띄는 응집력이다.
6시 40분쯤 되니 현관문을 열어주어 1등으로 알베르게 출관. 어둠 속에서 더듬이며 매무새를 확인하는 내 모습에서 “장미와 가시”를 떠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를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 장미와 가시, 김승희
해가 뜨려면 두 시간이나 남은 어둠, 좀 알싸한 느낌은 있지만 포근한 느낌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분다. App을 켜고 시내를 걷는데 길을 잘못 든 모양, 친절한 새벽 산책 아줌마가 손을 잡다시피 이끌어 다시 Camino로 데려 준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9시 20분 첫 마을 따르다호스(Tarjados) 도착. 10km를 넘게 쉬지 않고 걸어온 셈. 도중에 간밤 알베르게에서 본 한국아가씨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간다.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그냥 허리색 정도만 차고 물 찬 제비처럼 미끄러지듯 멀어진다. 매번 Donkey 서비스로 짐을 다음 마을로 보낸다니 - 아, 그렇게 지고 갈 짐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홀가분할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 져야 할 필요가 없는 짐까지 지고 걷는 건 아닐까?
따르다호스에서 차 한잔. 쉬면서 오늘 일정을 가늠한다. 여기부터 오르니요스(Hornillos del Camino) 까지는 11km, 그다음 마을 온타나스(Hontanas) 까지는 21km, 메세타 구간임을 감안 Go-Stop 이 중요해진다. 오늘은 욕심부리지 않고 오르니요스(Hornillos) 까지만 가기로 한다.
다시 출발, 친절하지 않은 안내판 덕에 마을 골목길에서 헷갈리다가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아! 이 길은 순례길이지! 문화탐방도 성취감을 위한 과업도 아닌 순례길. 그렇다면 모든 길은 결국 성당으로 모이지 않을까. 높은 종탑을 따라가 보니 과연 가리비 표시가 있다. 예전 이곳 성당은 순례자를 위한 구제소이자 안내소, 고충 해결소였을 것이다. 지금은 퇴락한 성당 정문에 서서 짧은 기도, 성호를 긋고 내려온다
두 번째 마을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é de las Calzadas). 인구 200명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 어귀를 지날 때, 작고 다소 초라한 성당에서 은은한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흘러나온다. 나도 모르게 성당으로 발걸음, 지팡이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성소안, 제단에는 은은히 촛불이 타 오르고 성가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천상의 느낌. 어두운 문쪽에 서 있던 수녀님이 제단을 향해 조용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손을 잡아 기도하고 싶냐고. 나는 아니라고 했는데 몇 가지를 묻더니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한다 (영어로, 대충 이런 뜻으로 기억한다)
“ …. 이 나그네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에 나섰으니,
부디 건강하고 안전하게 여정을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항상 주님의 품 안에서 강건하게 하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이역만리 생면부지의 나그네에게 기도를 올려주시는 노 수녀님의 따뜻한 손길과 마음, 이미 Camino 길을 다 걸은 듯한 진한 감동이 왔다. 수녀님이 아주 작은 성상이 달린 목걸이를 걸어주며 다시금 손을 잡아준다.
깊은 감동 탓인지 오르니요스 까지는 금방이었다. 메세타의 공활한 하늘과 들판 그리고 바람. 사방을 둘러봐도 그냥 천지가 빈 듯한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1시가 되기 전 오르니요스(Hornillos) 도착. 다행히 알베르게 오픈, 체크인하고 씻고 휴식. 오늘은 기도 덕분인지 전혀 피곤하질 않다. 남들은 지겹다고 하는 메세타 구간이 오히려 감동이고 기대가 된다.
저녁은 숙박자 전부 모여 조용한 만찬, 청년과 노인이 반반이다. 확실히 초기의 떠들썩한 분위기 사해동포적 공감의 시간은 지나갔다. 조용히 식사를 하고 와인도 많이 남긴 채 그렇게 저녁이 끝나고 오늘 하루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