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D+13(부르고스)

아름다운 부르고스의 강변길

by 호변나그네

D+13 (10/21 Tue) Cardeñuela Riopico - Burgos

아직 어두운 7시 40분 출발. 비가 왔다. 이슬비 보슬비 옅은 운무가 어둠 속에 가득했다. 가는 비라고 해도 몸을 적시니 성가심이 다를 게 없다. 제법 진행하다 판초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멈춰 우중행군 채비를 했다. 그러다 무심코 만져본 바지 주머니, 아뿔싸 에어팟이 만져지지 않는다. 분명히 어제 침대머리에 둔 기억이 나고 아침에 샅샅이 다 살펴보고 나왔는데 어찌 된 걸까? 우리 얘들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거리 불문 다시 가져와야지.

다행히 그리 멀리 오지 않은 것 같다. 20분여를 되짚어가서 알베르게 다시 도착. 생각처럼 침대를 조금 옮기자 벽사이에 끼어 있던 에어팟이 딸깍 떨어진다.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은 여인처럼 마냥 즐거워졌다. 잔치도 베풀고 싶어졌다.


이젠 머물렀다 일어설 때 주문처럼 외던 전지현이 아닌 “전지여”(전화기-지갑-여권)에 한자를 추가 ”전지여포“ (+에어팟)의 주문을 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현재까지 둘째 날 두고 온 모자 외엔 잃어버린 게 없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다소 어수선한 출발, 8시 20분, 카르데뉴엘라(Cardeñuela) 마을에서 나오자마자 길을 잃었다. 표지판이 보이질 않아 구글맵을 따라가다 보니 전혀 다른 길로 안내가 되었다. 이번에는 Camino 도 아니고 효율도 아닌 아주 이상한 곳으로 안내가 된다. 끝없는 시골길이다. 방향은 맞겠지 싶어 걸어온 거리가 아까워 그냥 전진한다.

9시가 넘어도 아직 들도 길도 다 어둡다. 두보(杜甫)를 외며 어둡고 축축한 땅을 밟고 간다.


“야경운구흑 (野徑雲俱黑) 들과 길은 구름이 덮여 다 어둡고

강선화독명 ( 江船火獨明) 강 위의 배 불빛만 호올로 밝다

효간홍습처 (曉看紅濕處) 새벽에 붉게 젖은 땅을 보니

화중금관성 (花重錦官城) 금관성에 꽃이 많이도 폈겠구나”

- 춘야희우(春夜喜雨), 두보 (杜甫)


이처럼 부슬비 내리는 어두운 아침 부르고스로 향하는 길 걸음이 금관성 꽃을 그리는 시인의 심경과 비슷할 것이라

10시경 카스타냐레스 (Castañares) 마을 진입이다. 비가 잦아들었다. 이 마을은 Camino에서 우회로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무리 지도 연구를 해도 3갈래 길이 부르고스 (Burgos)로 통한다. 동네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시켜놓고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 중인데 반갑고도 반가운 가리비 매단 순례객을 만났다.

호주 태즈메이니아 (詩心 시심 넘치는!)에서 왔다는 앨런 (Allen). 본인은 세 번째 Camino를 걷는데 강변길을 통해 부르고스로 들어가려고 일부러 우회, 이길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전 두 번은 공항을 거쳐 가는 삭막한 길이라 영 별로였다고. 오늘 구글맵 따라 오느라 혼났다고 하니 부엔카미노 앱 (BuenCamino App)을 쓰면 그렇게 헤매지 않을 거라고 친절하게 사용법도 시연해 준다. 기연 (奇緣)이고 가연 (佳緣)이다.

앨런 할배와 걸은 8km의 강변길은 정말 다시 걷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도 영감이 넘치는 길이었다. 뜻하지 않게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 같았던 평강의 길, 지금 생각해도 맘이 푸근해진다.

정오 무렵 부르고스 시내 입성, 줄곳 배려심 많게 길을 안내하던 앨런과 시내에서 작별, 그는 여기서 연박을 하기 때문에 사설 알베르게 예약을 했다고 한다. 작별의 허그를 하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God Bless You! 의 축원.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세요, Allen!

부르고스 알베르게 도착. Open 이 2시로 되어 있어 남는 시간을 이용해 라멘을 먹자고 웅장한 계획의 실행 돌입. 알베르그에서 약 700m 떨어진 라멘집을 찾으니 내가 첫 손님이다. 사포로 맥주 & Spicy Ramen 시키고 집 떠난 2주 만에 국물 음식을 먹다. 참으로 감사의 순간.


식사 후 알베르게 체크인. 시내 한복판 부르고스 대성당 바로 지척의 현대식 편리 숙소. 이런 위치의 멋진 시설에 10유로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역시 대도시에 오니 한국인 순례객이 많다. 오늘 6명이나 만났다. 떠들썩하다!

부르고스는 인구 18만 명의 대도시, Camino 선상에서 팜플로나 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부르고스 대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스페인의 국민 영웅이자 레콩키스타의 상징인 엘 시드(El Cid)의 고향이자 묻힌 곳이기도 하다.


엘시드 하면 옛날 영화에서본 엘시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죽은 줄 알았던 엘시드가 나타나자 무슬림군들은 혼비백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카스티야군의 공격으로 끝내 발렌시아를 지켜낸다. 이미 숨진 엘시드는 백마를 타고 (앉혀져) 긴 해변을 따라 영원을 향해 달려 나간다. 동료들의 애틋한 기도가 해변에 울려 퍼진다


“주여, 당신의 팔을 벌리시어 가장 순수한 기사였던 이 영혼을 받아 주소서. Heavenly Father, Open your arms to receive the soul of one who lived and died, the purest knight to all” - 우리도 그처럼, 언젠가 그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활짝 팔을 벌려 맞아 주시길, 손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길.


여기 부르고스에서 레온 (Leon) 까지는 메세타 (Meseta) 구간으로 약 180km. 햇볕, 바람, 고요함 속으로의 걸음이 시작된다. 기대가 무척 크다.


저녁엔 Pincho 안주로 맥주 두 잔. 무척 감미로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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